解語花·3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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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平壤)은 옛적 ‘색향(色鄕)’으로 불리던 곳이다. ‘녹파잡기’는 고려 중기의 시인 정지상(鄭知常)이 평양을 무대로 쓴 시 ‘송인(送人)’ 중 마지막 구절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에서 딴 것으로 명지대 안대회(한국한문학)교수가 최근 찾아냈다.

‘녹파잡기’는 개성 명문가 출신의 시인 한재낙(韓在洛·생몰연대 미상)이 평양의 내로라하는 기생들을 직접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산문인데 풍속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한재낙은 개성의 자연·사적 등을 기록한 ‘고려고도징(高麗古都?)’을 썼던 조선 정조·순조 무렵의 저명한 학자인 한재렴(韓在濂·1775~1818)의 친동생이다.

한재낙은 자신이 만난 평양 기생들을 서정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문체로 그려냈다. 인용하자면 이렇다. “봄날의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화월(花月)은 비단 주렴을 걷어 달빛을 방안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더니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요. 이렇게 멋진 밤을 어찌하면 좋지요’라 했다. 함께 대동문 성루에 올랐다. … 그녀는 은비녀를 뽑아 난간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는 구슬을 꿴 듯 청아하게 반공에 솟아 감돌았다. 모래밭의 갈매기는 깜짝 놀라 날아오르고 지나가던 구름은 멈춰서 노래를 듣는 듯 하였다.” “영희(英姬)는 빼어난 미모에 가무를 잘하지만 내색을 하지 않는다. 주렴을 걸고 서안(書案)을 놓고 자기와 서화를 진열하고 온종일 향을 사르며 단정히 앉아 있다. 방문 앞을 지나가도 적적하여 사람이 없는 듯 하다. 난초 그리기를 즐겨 옛사람의 필의(筆意)를 깊이 터득했다.” “경연(輕燕)은 복사꽃이 얼굴에 서려 있고, 곱게 세련된 자태가 뛰어나다. 노을빛 치마는 가볍게 날리고 구름 같은 머리는 드높다.”

문장이 이렇게 유려하다. 아마 기생들도 마음을 주었을 것 같은데 아무튼 한재낙은 기생을 기예와 서화를 겸비한 예술인으로 묘사했다.

“봄날 난간에 기대어 슬픈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영주선”이나 “자태가 풍성하고 풍류가 세련된 죽엽” 등 “붓으로 노래하고 먹으로 춤을 추는 평양 기생”을 67명이나 만나 대동강변을 거닐거나 부벽루 또는 달빛이 저고리에 스며드는 기방에서 주흥과 정담을 나눴을 한재낙이야말로 진정한 풍류객이다. 오늘날도 ‘녹파잡기’에 나오는 ‘해어화(解語花)’ 같은 여인들이 있는 지 모르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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