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의 38선 일원에 걸친 남침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사흘만에 함락됐다.
학도병이 최초로 참전한 것은 6월28일 한강방어선이다. 그러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탱크는 고사하고 박격포 하나 변변히 없었던 국군은 수류탄을 품은 육탄으로 탱크를 막았으나 밀리고 또 밀렸다.
수원에서 500여 명의 학생으로 비상학도대가 결성된 것이 6월30일이었고, 이어 수도사단 3사단 등에 배속되어 포항전투 등에 참전했다. 군복도 입지 못했고 군번도 없었다. 그저 총 한자루 쥐고 총격전을 벌이고 때로는 육박전을 벌였다. 학생복 차림에 이마엔 ‘학도병’이라고 쓰인 수건을 동여맨 채 전사한 학생들이 시산혈하를 이루었다.
1950년 10월3일 동료 학생인 전우의 주검으로 살아남은 학도병들이 38선을 넘어 이윽고 북녘 땅으로 진군했다. 전세가 호전되어 학도병들은 다시 학원으로 되돌아가라는 학도의용군 해산 명령이 내려진 것은 1951년 3월6일이다.
6·25전쟁 당시 경기도에서 자원한 학도병은 수원중학교(이땐 고등학교가 없었다)를 비롯한 37개교에서 220여 명이다. 전국적으로 2천여 명이 참전하여 1천500여 명이 전사했다.
‘군인 아닌 학도의 몸으로 / 옥이 되어 부서져 버렸네 / 찬란하다 이 나라 소년의 의기 / 서릿빛 무지개 되어 이 땅 청산마다 길이 꽂혔네’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원로 문인이 ‘전몰 학도의용병’에게 바친 추모시의 몇 구절이다.
수원고등학교 학생들이 6·25 당시 참전한 전몰 학도병 기념비 앞에서 ‘꽃다운 젊은 생을 조국에 바친 선배들을 추념했다’는 본지 보도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자랑스런 선배에 자랑스런 후배들을 보는 것 같아 눈시울을 적신다.
아! 이름모를 산야에서 산화한 학도병들이여, 님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압니다, 편히 잠드소서.
/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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