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이누이트족의 눈에 대한 명칭이 23개 있는 것처럼 한국에는 미국에 대한 8가지 감정이 존재한다.”
미국 뉴욕의 국제관계 싱크탱크인 외교관계위원회(CFR)의 남미 담당 이사인 줄리아 스웨이그가 그녀의 저서 ‘아군을 향한 오발(Friendly Fire) : 반미의 세기에 친구 잃고 적 만들기’에서 한 말이다. 스웨이그는 “한국에는 미국을 반대하는 ‘반미’와 숭배하는 ‘숭미’뿐 아니라 혐오하는 ‘혐미(嫌美)’, 찬성하는 ‘찬미’, 연대하는 ‘연미(聯美)’, 이용하는 ‘용미(用美)’, 저항하는 ‘항미’, 비판하는 ‘비미’ 등 8개 단어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스웨이그는 한국내 반미감정의 역사적 배경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필리핀 강점에 대한 일본의 묵인을 대가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인정한 것과 한반도에 군사분계선을 그어 놓은 미·소 얄타회담, 미국의 젊은 대통령들에 의한 분할통치 제안, 반탁시위 등을 들었다.
스웨이그의 지적은 정확하다. 미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구세대에게는 보은의 감정을 품게 했지만 전후 분단 상황과 미군의 주둔은 적대감으로 연결됐으며, 이는 ‘독립’을 이루지 못한 좌절감이 반미감정으로 나타났다. 특히 1980년 당시 군부 지도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한미연합사령부 책임 장교에게 사전 통지 없이 광주로 병력을 이동시킨 뒤 이를 마치 미국이 승인하고 대량 학살을 묵인한 것처럼 한국인들을 오도했다.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반미 감정은 가라앉는 듯 했지만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 노근리 사건, 여중생 사망사건, 북핵위기를 둘러싼 한·미 공조 마찰 등으로 더 심화됐다.
미국의 군사력 등 하드파워는 강해지고 있으나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는 매력, 즉 소프트 파워가 약해지고 있는 사실을 반미 원인으로 꼽은 스웨이그의 분석력이 돋보인다. 미국에 대한 극단적인 반미와 친미, 숭미는 있을 수 없다. 용미, 연미가 있을 뿐이다. 1880년 8월 동북아의 격동 속에서 조선이 생존을 고민하고 있을 때 주일 청나라 공사 하여장(何如璋)이 부하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통해 권고한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親中國), 일본과 맺고(結日本), 미국과 이으라(聯美國)”는 내용이 생각난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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