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북의 미사일 발사 당시 가장 심각하게 여겨야 할 남쪽 사회가 너무 이완됐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하다못해 일본 사회보다 긴장감이 덜했다는 것이다.
딴은 그렇다. 미사일 보도에도 불구하고 바캉스도 여전하고 해외 나들이도 여전했다. 그동안 북에 갖다준 게 얼만데 설마한들 전쟁이야 일으키겠느냐 하는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6·25전쟁 발발 당시도 그랬다. 1950년 6월25일 새벽에 인민군대가 일제히 남침한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국군 헌병대 지프가 한강에 나와 확성기로 외쳤다. “괴뢰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했으니 외출중인 장병들은 빨리 원대복귀하라! 원대복귀하라!!”고 했다. 물론 서울시민들도 확성기소릴 들었다. 그러나 태무심하고 여전히 보트놀이를 즐겼다. 설마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사흘뒤 폭파된 한강 인도교가 피난민 인파에 밀려 강물로 떨어져 죽는 주검의 사태를 이룰 줄은 꿈에도 상상못했던 것이다.
북의 이중플레이 역시 6·25 때와 비슷하다. 6·25를 일으키기 직전 북측은 체포된 남파 거물간첩 김삼룡 이주하와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된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과의 신병 교환을 제의해왔다.
이번 또한 북측은 미사일을 쏘기에 앞서 군사회담 연락장교회의를 제의해온 것이 3일 낮 12시5분이다. 연락장교의 만남을 7일 오전 10시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갖자는 것이었다. 그래놓고는 5일 새벽에 미사일을 7기나 쏘아댔다. 6·25 포화로 불 밝히고, 동시다발의 미사일 불꽃으로 불 밝힌 것도 다 새벽이다.
만약 그 중 단 하나의 미사일이라도 남쪽에 떨어지면 그 피해가 가공할만 하다. ‘불바다를 만든다’는 저들의 위협이 현실화하는 것이다. 동족에게 차마 그럴리가 있겠느냐는 설마의 믿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동족의 가슴에 총칼을 들이댄 6·25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미사일을 쏘아댄 사람들이다.
국가 안보는 100%를 추구하여야 한다. 단 1%의 누수가 99%를 무너뜨리는 재앙이 될 수가 있다. 안보 경각심엔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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