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원 또는 이발관이라고도 하는 이발소(理髮所)는 본래 서양에서 외과병원을 겸했기 때문에 간판이 적색·백색·청색으로 돼 있다. 이러한 간판의 시초는 1540년 프랑스 파리에서부터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유교사상에 의해 머리털은 신체와 함께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으로, 그것을 훼손하지 않는 것을 효(孝)의 시작이라고 하여 장발(長髮)을 지켜 왔다. 그러나 1895년 (고종 32) 11월 단발령이 내려지면서부터 서구식 이발이 시작됐다.
단발령을 발표한 날 고종은 대신들과 함께 머리를 깎아 짧게 깎은 머리의 1호를 기록했다. 당시 일부 대신들은 단발령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것이 급기야는 을미의병운동의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머리의 모습은 1920년을 전후로 많은 청년들이 일본에서 유학하면서부터 외형적 변화를 크게 일으켰다.
당시 문학지에는 “하이칼라 머리에 망토를 걸친 …”등의 말이 유행했다. 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초까지 남자머리모양의 유행은 가리마를 타는 것과 가리마 없이 완전히 뒤로 빗어 넘기는 ‘올백 형’으로 나뉘어졌다.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는 젊은층이나 중년층 할 것 없이 장발이 유행하여 귀를 덮는 머리 모습이 성행하였다. 따라서 이발소에서는 기계보다는 가위를 주로 사용했다.
어린이의 머리는 광복 후 한동안 짧은머리와 상고머리가 계속되다가 1960년대 이후 점차 길어지게 되었다. 중·고등학생의 경우 1960년대초까지는 대체로 짧게 깎다가 점차 ‘스포츠 형’이라 하여 앞머리를 3~5㎝ 정도로 기르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너무 길어져 장발 학생들의 풍기를 단속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81년 문교부가 학생들의 두발 자유화를 발표하면서부터 귀만 덮지 않은 정도의 긴머리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발소의 종사원은 1960년대까지 모두 남자들이었는데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머리를 깎고 다듬는 일은 남자 이발사가 하고, 면도하는 일은 ‘면도사’라 하여 여자가 담당하는 곳이 많아졌다. 이발소의 내부 모습도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 대도시에 칸막이의 밀실이 등장, 당국의 단속 대상이 되었다. 일부 이발소들이 밀실에서 유사 성행위를 일삼는 음란퇴폐업소로 전락한 것이 안타깝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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