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무궁화 보급운동을 펼친 한서 남궁억(翰西 南宮檍·1863~1939)선생은 일찍이 겨레의 가슴에 나라꽃 무궁화 정신을 심어준 선각자였다. 배화학당 교사 시절 가정시간에 무궁화꽃으로 한반도 지도와 태극기를 수놓게 해서 선물로 주고받도록한 이른바 ‘수본(手本)운동’을 전개했다.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한 뒤 자신의 밭 수천 평에 무궁화 묘목을 심어 해마다 전국 학교와 교회, 기독교단체, 가정에 분배했다. 무궁화를 곁에 두고 그 강인한 생명력을 통해 거레의 얼을 지키고 질긴 역사의 믿음과 미래를 확신하려 함이었다.
한서 선생은 서울에서 출생, 1884년(고종 21) 동문학(同文學· 영어학교)을 수료하고 궁내부별군직(宮內府別軍職)을 거쳐 1893년 칠곡군수를 지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관직을 사임하고, 그해 7월 서재필·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했으며, 1898년 9월 나수연·유근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침략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사설 등을 계속 실어 민족정기를 드높였다. 이후 성주목사,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밀파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매 관직을 사양하고 상경, 그해 11월 오세창·장지연 등과 대한협회를 창립,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그해 배화학당의 교사가 되었고, 1912년부터 상동(尙洞)청년학원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8년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에 낙향, 이듬해 모곡학교를 설립하고 무궁화의 정신으로 새 시대를 열어가자는 구국운동을 주창했다. 한서 선생의 무궁화예찬시들은 그 무렵 탄생했다.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 춘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 /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 // (후렴) 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 / 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 백화가 만발한 무궁화 동산에 / 미묘히 노래하는 동무야 / 백천만 화초가 웃는 것같이 / 즐거워라 우리 이천만”
당시의 입말에 맞춰 쓴 ‘무궁화 노래’는 쉬운 곡에 얹혀 겨레의 노래가 됐고, 무궁화 묘목과 함께 삼천리 강산으로 번져갔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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