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쌀이 전해진 시기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6000 ~ 7000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북쪽을 통해 들어온 쌀농사는 남부로 퍼졌고, 농사 조건이 좋은 영·호남지방에서 발달했다. 그런데 1988년 충북 청원군 소로리 구석기유적 토탄층에서 발견된 볍씨는 1만년 이상 된 것으로 분석돼 쌀농사를 짓기 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야생벼를 채집해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 330년쯤 만들어진 대규모 저수저인 전북 김제 벽골제는 당시 백제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벼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농업용수 확보에 노력했다는 증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문루왕이 즉위 6년 (32년)에 명을 내려 논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보다 앞서 주몽이 큰뜻을 품고 고구려를 세우기 위해 북부여 땅을 떠날 때 어머니 유화부인은 곡식의 씨앗을 전해준다. 신화 속에서 주몽의 어머니는 농사를 관장하는 곡모신(穀母神)으로 표현된다. 시집가는 신부의 가마 속 방석 아래에는 으레 곡식 낟알을 깔았다. 유화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한 집안의 생명줄을 지켜나갈 볍씨 관리를 신부의 가장 큰 책임으로 여겼던 것이다.
‘벼’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브리히(Vrihi)’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니(Ni)’ ‘누안(Nuan)’ 등으로 불렸다. 이는 우리말 ‘논’과 비슷하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는 벼를 ‘바디(Badi)’ ‘빈히(Binhi)’ 등으로 부르고 있어 우리와 유사성(類似性)이 있다.
쌀도 고대 인도어 ‘사리(Sari)’를 어원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쌀을 뜻하는 한자 ‘미(米)’는 벼이삭을 본뜬 상형문자다. 일부에서는 ‘米’자를 ‘八十 + 十八’로 분해, 66차례나 손길이 가야 하는 쌀농사의 특성을 표현한 글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쌀사랑범국민운동본부가 8월18일을 ‘쌀의 날’로 정한 연유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들은 집을 다스리는 신을 성주대감이라고 일컬었다. 대청 한구석에는 성주단지 또는 신주단지로 불리는 쌀 항아리를 고이 모셔 놓았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 우리 민족의 소원은 ‘흰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쌀이 넘쳐난다. 그래도 쌀은 여전히 소중한 영원한 외경(畏敬)의 대상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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