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문화예술계에 ‘팩션(faction)’ 바람이 한창이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로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 사실을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인 팩션은 소설의 경우 최근 오세영씨가 조선시대 22대 왕 정조와 다산 정약용을 주인공으로 하는 ‘원행’을 펴냈다. 다산이 1795년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 즉 원행 때 왕을 시해하려는 자들과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친다는 내용이다. 이정명씨의 ‘뿌리 깊은 나무’도 조선시대의 역사에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한 작품으로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집현전 학사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고 추리한다.
현재 진행형의 역사를 소설 공간에 끌어 온 김진명씨의 ‘신의 죽음’은 북한 김일성의 사망이 중국의 동북공정 음모와 관련이 있다는 전제 아래 한반도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국제열강의 파워게임인데 방대한 자료를 제시해가며 파헤친다. TV 드라마 ‘김구’를 집필한 이봉원씨의 소설 ‘국새’는 분실된 것으로 알려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새를 찾기 위한 여정을 그렸고, 김재희씨의 ‘훈민정음 암살사건’은 우연한 소매치기 사건을 계기로 등장한 세종의 친필문서를 열쇠로 한글 창제의 비밀과 이를 은폐하려는 일본 우익들의 음모가 드러난다.
정치사가 아닌 문화예술사를 작품소재로 삼은 오명근씨의 ‘그 이상은 없다’는 한국형 팩션의 진화로 볼 수 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문인들의 일상과 연애담을 소설 형식으로 꾸민 이 작품에선 이상·김유정·임화·정지용·노천명·모윤숙·최정희씨 등 당대의 문인들이 주인공인데 애욕에 시달리는 보통 인간으로 그려진다.
소설의 팩션 현상은 ‘다빈치 코드’의 성공 이후 밀어닥친 외국 소설의 팩션 붐과 함께 영화, TV드라마의 팩션이 인기를 끈 것이 한 원인이다. 그러나 오락성에 치우쳐 극적갈등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자의적 역사 해석, 왜곡의 문제가 발생된다. 또 역사 인물이든 현존인물이든 명예훼손의 우려도 상존된다. 금강산을 배경으로 실존 화가의 생애를 다룬 한 소설이 실제 본인이 허락을 받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 논란에 휩싸인 게 한 사례다. 독자의 흥미는 끌 수 있으나 현존하는 인물의 행로를 사전 동의 없이 소설에 담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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