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친구 중 L은 간질을 비관하다가 20대 초반에 자살했다. 고교생 시절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불던 L이 간질로 고생하는 걸 알고 친구들은 참 난감했다. 얼굴도 잘 생기고 활달해 여고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던 L이 간질 증세가 나타난 것은 고1 때라고 지지대子에게 고백했다. 비참한 자기 얘기를 소설로 써달라는 말까지 했다. 여러 병원에 다니며 진료받고 온갖 민간요법을 다 써 봤는데도 효과가 없다고 눈물을 흘렸다. 호숫가의 물거품이 특효라고 하여 먹었다는 사실도 털어놨다. 무당한테 들었다면서 사람 해골에 고인 물을 먹으면 간질이 낫는다는 말을 하며 내 의중을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나 경찰 간부인 아버지의 전근지로 이사 간 후 L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문가들의 설명에 의하면 간질은 한마디로 경련 증상이 여러 번 반복되는 질환이다. 인간의 뇌에는 전깃줄과 같은 신경세포가 수백억개가 모여 있는데 이 신경세포 중 일부가 합선되면 ‘스파크’가 일어나 뇌가 수용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전기가 흐르게 된다. 결국 뇌는 전기의 흐름을 조절할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해 뇌세포들이 흥분, 경련 발작이 일어난다.
간질은 주로 유전적 요인이 있거나 뇌에 생긴 이상 때문에 발생하지만 다른 병에 의해 뇌 기능 장애가 일어나 2차적으로 생기기도 한다. 과거엔 간질을 악령 혹은 신이 내린 천벌쯤으로 생각해 아무런 치료 방법이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완치가 불가능한 정신질환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통해 간질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있는 중이다. 약물요법만으로도 특별한 뇌 손상없이 85%까지 경련발작을 억제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약물을 병용하는 방법으로 조절이 안 되는 난치성 간질의 경우에도 뇌수술을 통해 경련발작을 눈에 띄게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간질을 앓았지만 시대를 뛰어 넘어 이름을 남긴 위인도 많다. 나폴레옹, 알렉산더, 소크라테스, 피타고르스, 반 고흐, 도스토예프스키, 단테, 헨델 등이 바로 그들이다. 지난 9월9일은 ‘귀의 날’이자 ‘자살예방의 날’ 이었지만 ‘간질의 날’이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간질을 비관하다가 끝내는 세상을 떠난 L의 얼굴이 생각난다. L의 부탁대로 소설을 써 그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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