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러시아 오페라 무대를 만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2006년 한국-러시아 교류축제' 프로그램에 러시아의 헬리콘 오페라단 공연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오페라 팬들에게는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더구나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이나 '스페이드의 여왕'이 아닌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라니!
오페라 팬들은 마음 설레며 부지런히 성남아트센터 오페라 극장으로 향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이 작품을 언제 또 볼 수 있겠느냐"면서….(9월22-24일, 3회 공연)
물론 걱정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우선 '현대음악은 지루하고 난해하다'는 일반적인 선입견이 있는 데다 공연 시간이 비교적 긴 작품(2시간40분 가량)이어서였다.
게다가 '아이다'나 '카르멘'처럼 무대 위에 화려한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작품도 아니다. 4막9장으로 이루어진 이 오페라의 사건 대부분은 집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진다.
그러나 헬리콘 오페라단은 첫 장면부터 관객들을 놀라운 흡인력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소프라노 카린 그리고리안(23일)은 일상의 권태와 무기력증에 진저리를 치다가 자기 집 하인 세르게이와 사랑에 빠지는 여주인공 카테리나 역으로 관객을 매혹했다.
청중을 전율하게 하는 소프라노 스베틀라나 소즈다텔레바(22일/24일)의 성량과 카리스마에는 미치지 못했겠지만, 그리고리안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채 오로지 욕망의 충족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 유부녀의 열락과 고통을 뛰어난 연기력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이 카테리나를 "긍정적인 주인공,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주인공"으로 묘사하기를 원했고, "억압하는 시아버지 및 만족을 주지 못하는 남편을 살해하는 카테리나의 행위에 필연성을 부여하려"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원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대본을 알렉산더 프레이스와 함께 만들어낸 쇼스타코비치는 이 극의 구성과 대사로 관객을 설득하는 데 그리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시아버지 보리스가 "나는 처음부터 이 결혼을 반대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카테리나가 어떤 강압이나 강요에 의해 부유한 상인 지노비의 아내가 된 것도 아니고, 시아버지나 남편에게 폭행을 당한 것도 아니다.
세르게이가 채찍질을 당하는 것을 보고 카테리나가 시아버지를 살해할 결심을 하는 것도 인도적인 동기에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비판적-사실주의적인 연출을 통해서는 이 여주인공의 범죄행위를 변호할 방법이 없다.
그런 맥락에서, 연출가 드미트리 버트만이 택한 상징주의적 연출 방식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배관실 혹은 기계실 같은 살벌한 분위기의 다섯 칸짜리 무대 배경 구조물과 붉은 소파는 4막 내내 변화가 없지만, 그 단일한 공간을 통해 연출해내는 효과는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1막에서는 카테리나의 침실을 이동식 철창으로 조립해, '감옥에 갇혀 살아가는 듯한' 그녀의 답답한 내면 세계를 보여준다.
바로 그 철창 공간 안에서 카테리나는 세르게이와 정사를 나누며, 역시 그 안에서 세르게이와 함께 남편 지노비를 살해한다(2막).
집안 하인들이 요리사 악시냐를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장면과 세르게이가 채찍질 당하는 장면은 원래 대본에서는 집요하리만큼 자연주의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버트만은 이 두 장면을 상징주의적으로 처리함으로써 관객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대신 유희적인 즐거움을 주고 있다.
감정이입 대신 '거리 두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3막에서 결혼피로연 하객들이 배관실 공간 안에 정지화면처럼 들어 차 있다가 달려나와 광란의 춤을 보여주는 장면 역시 살인과 축제를 하나로 엮는 그로테스크한 효과를 연출한다.
피로연 도중 술을 찾으러 지하실로 내려간 농부 하나가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해 카테리나와 세르게이가 체포되는데, 이때 시베리아 유형지로 이들을 호송하는 호송차 안의 풍경도 역시 전 막과 동일한 공간에서 처리된다.
3막에서 4막으로 계속 이어진 '의자놀이'(합창단 또는 극중의 군중이 다수의 의자를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옮기며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는 현대극에서 수시로 사용되는 테크닉이어서 참신한 연출 방식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합창단의 빠르고 정확한 장면 전환의 연기력에 힘입어 그 효과는 결말로 갈수록 커졌다.
카테리나가 아기(인형)를 자궁에서 꺼내 산산조각 내버리는 4막의 장면도 충격적이라기보다는 '그로테스크'의 연장이다.
세르게이의 새로운 욕망의 대상이 된 소네트카를 초기 카테리나와 똑같이 분장시켜 웨딩드레스 차림의 카테리나와 서로의 목을 조르며 대결하게 만든 마지막 장면의 설정은 무엇보다도 탁월했다.
이 오페라를 처음으로 감상한 관객 대부분이 놀라움을 표시했듯,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결코 어렵지 않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통속적이며 오락적이다. 블라디미르 폰킨이 지휘한 헬리콘 오페라단 오케스트라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의도대로 육체의 원시적인 욕망을 음악으로 격렬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정확하고 감각적인 연주, 특히 금관악기들의 정제된 소리는 감상자들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미국식 뮤지컬을 모방한 몇몇 구태의연한 장면이 참신한 매력을 떨어뜨린 것은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러시아 연극의 전통적인 힘을 실감하게 하는 밀도 있는 공연이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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