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은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세월이 가면’
8·15 광복 후의 혼란과 소용돌이, 6·25 전쟁의 황폐를 의식하면서 도시적 서정시를 쓰다가 30세로 요절한 박인환(1926~1956) 시인은 ‘세월이 가면’을 서울 명동의 한 주점에서 즉흥시로 지었다. ‘명동백작’ ‘댄디 보이’로 불리던 박인환은 주점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세월이 가면’을 썼고, 한 자리에 있던 극작가 이진섭 역시 즉석에서 작곡, 테너 가수 임만섭이 이 곡을 즉석에서 불렀다. 가히 전설적인 일화다.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샹송’으로 유명해지고, 가수 박인희의 목소리로 국민적인 애창곡이 됐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올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 (중략)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 목마는 하늘에 있고 /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 가을 바람 소리는 /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
‘목마와 숙녀’도 시대적 고뇌를 노래한 서정시이지만 그러나 박인환은 감상주의적 시인이 아니었다. 현실비판적이었다. 기자의 신분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였고,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1952년 퇴사했다. 지난 8월 발간된 전집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에 실린 시 80편과 산문 70편이 박인환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어느새 가을이 되었다. 박인환의 계절이 되었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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