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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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자(道學者)로 주자성리학을 조선화시킨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은 시인이며 서예가였다. 평생 140여회의 벼슬이 내려졌어도 70여회를 병이나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1566년 7월, 명종이 기대하는 뜻이 간절한데도 퇴계가 오지 않자 독서당 신하들에게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는다’(招賢不至歎)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고, 화공에겐 ‘도산도’를 그려 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써서 병풍을 만들게 했을 정도다. 퇴계가 이렇게 출사를 거절한 실제 이유는 학문의 목적을 출세가 아닌 자기수양에 두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생애 가운데 50, 60대 도학자로서의 역정을 저술 중심으로 보면, 53세 때 ‘천명도설후서·부도’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주자사설요’ ‘계몽전의’ ‘자성록’ ‘고경중마방’ ‘송계원명이화통록’ ‘심무체용변’ ‘심경후론’ ‘전습록변’ ‘성학십도’ 등 상당수에 이른다. 이 중 ‘이기호발설’을 중심으로 하는 주리적 정통론은 ‘주자서설요’ ‘사단칠정논변’을 통해 확립됐고, 거궁궁리로 요약되는 퇴계 도학에서 심학의 문제는 ‘심경후론’과 ‘성학십도’에 집약되었다.

퇴계는 이들 저술을 통하여 성리설·예학·수양론·의리론 등에서 조선시대 도학 이념의 여러 기본영역을 확고히 정립하고 심화시켰다. 요컨대 평생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로 일관한 퇴계의 생애와 학문은 스스로 지은 ‘묘갈명’에서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라고 고백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실천궁행으로 역사에 사표가 된 퇴계의 참모습은 최후의 순간에 더욱 빛이 난다. 퇴계가 70세를 일기로 작고한 해인 1570년 12월 4일 조카 영에게 받아쓰게 한 유언장은 국장(國葬)을 치르지도 말고, 값비싼 유밀과(油蜜果)는 물론 비석도 쓰지 말고, 작은 돌에다 앞면엔 단지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게 할 정도로 검약했다. 같은 날 제자들에게 평소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종일토록 강론했고,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다. 또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명하고는 유시(酉時, 오후 5~7시)초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 받고 일어나 앉아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고매한 도학자다운 생애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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