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민요 명창 김옥심(1925~1988)은 양주에서 태어나 8살에 동기로 조선권번에 입번해 소리를 사사했다. 1958년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내로라하는 명인들을 제치고 1등을 하면서 국악계에 스타로 도약했다.
1962년 당시 국악인으로는 가장 많은 100여장의 음반을 녹음하고 각종 국악 관련 상을 휩쓸 정도로 인기와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1968년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며 연주와 녹음, 후학 양성에 매진했으나 1975년 인간문화재 선정에서 ‘예능계를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탈락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옥심을 ‘불운한 명창’ ‘재야 인간문화재’로 부른다. 1960~1970년대를 풍미했던 명인이었지만 인간문화재 선정에서 탈락한 뒤 국악계에서 소외되고 소리 전수의 길이 막히면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던 탓이다.
그런데 최근 김옥심 소리의 정수를 모은 ‘김옥심의 서울소리’가 음반으로 출시됐다. 1982년 와병 중에 녹음한 가사 수양산가, 서도잡가 관동팔경, 엮음수심가, 회심곡 등을 비롯해 정선아리랑, 한오백년 등 민요와 잡가, 가사 등 장르를 망라한 16곡이 담겼다. 이 가운데 김옥심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정선아리랑은 서울소리에 맞게 편곡한 곡으로 발표 당시 큰 반응을 얻었다. 또 경기소리꾼으로는 처음 녹음했던 ‘수양산가’나 ‘엮음수심가’ 등 김옥심의 유품에서 발견된 릴테이프에 들어 있던 ‘선산애원성’은 국악사에 처음 공개되는 곡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번 음반은 서울소리와 김옥심을 복권하기 위해 애써 온 김문성씨의 각고의 노력끝에 완성돼 의미가 더욱 깊다. 김문성씨는 1996년 청계천을 지나가다가 골동품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을 들으며 ‘벼락을 맞은 느낌’으로 국악에 입문했다고 한다. 1천장 한정으로 발매된 이 음반은 경기소리 공연장에서 직판형식으로 판매된다. 경기민요는 ‘ 밝고 화려하다고만 생각되는데 김옥심의 소리는 우수가 깔려 있는 쓸쓸하고 애잔한 색깔’이라고 평가받는다. 김옥심 명창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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