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던 1970년대에 국기 강하식이란 게 있었다. 오후 6시가 되면 누구나 하던 일, 가던 길을 멈추고 애국가가 끝날 때 까지 부동자세를 취해야 했다. 특히 관공서에선 예비군 세 명이 국기 게양대에서 태극기를 향하여 거수경례를 하였고 내려진 태극기는 국기함에 정중히 보관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따라 나왔다. 국기에 대한 맹세문은 1968년 충청남도 교육위원회가 자발적으로 만들어 보급한 것이 시초다. 이후 당시 문교부가 1972년 8월 9일부터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시행토록 했다. 1980년엔 국무총리 지시로 국기에 대한 경례 때 ‘국기에 대한 맹세’를 병행 실시하도록 했고, 1984년 2월에는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대통령령으로 지정할 정도로 강화됐다. 그러나 이 규정은 시대 변화에 따라 1996년 개정돼 국기 강하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중 애국가를 연주할 경우 맹세문 낭송은 생략하도록 했다.
미국 공립학교 학생들도 매일 수업 시작 전에 “나는 미합중국 국기와 그것이 상징하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래 하나의 나라이며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이를 위한 자유와 정의 나라입니다”라는 맹세를 일제히 낭송한다. 이 충성맹세는 침례교 목사인 프랜시스 벨러미에 의해 1892년 처음 제정돼 1942년 법률로 공식 승인됐다. ‘하느님 아래’라는 구절은 없었지만 1954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요청으로 의회 결의에 따라 삽입됐다.
미 연방대법원은 이 충성맹세가 법률로 공식 승인된 이듬해인 1943년 ‘아동에게 충성맹세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지만 실제 교육 현장에선 이 판결이 대부분 무시됐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국가 강하식을 하지 않지만 각종 행사에선 국민의례를 통해 ‘국기에 대한 맹세’는 한다. 애국가 제창도 보통 1절만 하고 국민의례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국가 앞에 개인은 없다’는 국가지상주의는 위험하지만 국기와 국가를 경시해선 안 된다. 국가가 존립해야 개인이 살고, 개인이 존재할 때 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