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는 손목시계를 부쉈다. 정부와 함께 있다가 그만 참모회의 시각에 5분을 지각하게 됐다. “이보게! 내 시계가 늦은 건가?” 히틀러는 회의장에 들어서자 마자 이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미리 분침을 늦춘 시계를 옆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시계를 풀어 내동댕이 쳤다. 스위스제 시계였다. 히틀러는 1945년 5월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직전 지하 벙커에서 그 정부와 함께 권총 자살했다.

그 무렵은 시계가 무척 귀했다. 신사의 사치품이 시계였다. 1960년대까지도 귀했다. 식당에서 외상이 안통하면 으레 시계를 잡히곤 했다. 유별난 시계도 아니다. 그냥 보통 시계인데도 시계가 그만큼 귀중품처럼 취급됐다. 손목시계만 귀한 게 아니라 벽시계 같은 것도 귀했다.

지금은 흔해빠진 게 시계다. 이런 시계, 저런 시계 할 것 없이 생활 주변에 널린 게 시계다. 명품 시계가 아니고는 시계를 외상으로 저당잡을 음식점이 있을 수 없다. 아니, 명품시계라도 안잡을지 모른다. 가짜 명품이 많은 탓도 있지만 시계 자체가 귀중품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핵 실험에 따른 대북제재결의에서 사치품 거래 중단이 포함됐었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 나라에 웬 사치품인가 싶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치스런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지만 그래도 좀 생뚱맞은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근래 스위스가 유엔 제재에 따라 대북수출 금지 품목으로 시계를 들고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스위스제 시계는 세계 최고의 명품이다. 평양정권은 스위스 시계를 무던히도 좋아했던 것 같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동안만 해도 약 240억원에 해당하는 2천400만달러 어치를 사갔다는 것이다. 시계 개수로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스위스 시계가 비싸긴 해도 꽤나 엄청난 분량일 것이다.

시계란 시간만 잘 맞으면 그만이다. 요즘 시계 치고 시간 잘 안맞는 시계는 없다. 명품 시계 선호는 일종의 사치병이다. 선민의식 일지도 모른다. 설마 누구처럼 스위스 시계를 체면 치레로 일부러 내동댕이 치진 안했을 것이다. 선물용 하사품으로 스위스 시계가 많이 쓰인 것 같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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