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사담 후세인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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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맹주’였던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11월 5일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이란과의 8년전쟁과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된 1차 걸프전 이후에도 살아남은 후세인은 권력의 정점에 선 지 23년 만에 이젠 사형수 신세가 됐다.

1937년 티크리트 지역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후세인은 양아버지의 구박을 못 이기고 외삼촌에게 도망가는 등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반영(反英) 성향의 외삼촌 영향을 받은 후세인이 정치적 활동에 참여한 것은 20세때 급진적인 아랍민족주의를 표방한 바트당에 입당하면서부터였다.

후세인은 1968년 사촌인 아메드 하산 사담 장군이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1979년 7월 권력을 쥐기까지 후세인은 10년간 비밀정보기관을 이끌며 2인자로 버텼다. 당시 후세인이 ‘가짜’ 쿠데타 기도를 조작, 군부대 잠재적 라이벌 22명을 처형한 일화는 유명하며, 이같은 잔인성은 후세인의 철권정치의 바탕이 됐다.

반인류범죄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게 한 1982년의 두자일 시아파 148명 집단살해, 1987~1988년 할라브자 등에서 화학무기로 쿠르드족 5천명을 살해한 안팔작전 등은 후세인의 잔혹성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후세인은 자신의 이미지를 12세기 유럽의 십자군전쟁에 맞선 이슬람 영웅 살라딘으로 각인시켰다.

그러나 후세인은 1979년 이란혁명의 확산을 두려워한 미국의 전폭적 지원하에 이란과의 전쟁을 개시하는 등 한때 친미 인사로 분류되기도 했으며, 1차 걸프전을 계기로 미국과 멀어졌다. 후세인의 몰락은 이미 2003년 이라크전 개전과 같은해 12월 13일 고향 티크리트 인근 농가에서 미군의 ‘붉은새벽 작전’으로 체포되면서 예견됐다. 체포 당시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미군에 끌려나오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중동사회에 충격을 던져줬다.

재판 1년여만에 후세인이 사형선고를 받자 이라크내에서 “모든 이라크인들에게 가장 기쁜 날”, “후세인에 대한 사형선고는 불공정하며, 단지 미국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상반된 입장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나 후세인의 사형은 반드시 집행돼야 한다. ‘한 사람을 죽인 자는 살인범이지만, 수백명을 죽인 자는 영웅’이라는 말도 아닌 말이 또 유포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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