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소설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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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신문소설은 일본에서 배워온 신문제작방법에 근거한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소설은 1903년 한성신보에 연재된 ‘대동애전(大東崖傳)’이지만 작자가 분명치 않다. 일본인이 발행한 한성신보가 무서명(無署名)으로 ‘대동애전’을 실었기 때문이다. 그뒤 대한일보·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 등에 소설이 연재됐는데, 실제로 작자명을 밝힌 소설은 1906년 ‘만세보’에 게재한 이인직의 ‘귀(鬼)의 성(聲)’이다. 근대 장편소설의 효시로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無情)’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됐다. ‘무정’은 남녀상열지사가 한 대목도 없는데 자유연애의 파급에 위기를 느낀 봉건 양반들의 연재 중단 압력에 시달렸다.

1920년대에 들어와 신문소설은 신문지면 구성의 중요부분이 됐는데, 이광수의 ‘단종애사’(동아일보·1928~1929), ‘흙’(동아일보·1932~1933), ‘유정’(조선일보·1933~1934)과 김동인의 ‘젊은 그들’(동아일보·1930~1931). ‘운현궁의 봄’(조선일보·1933~1934), 염상섭의 ‘삼대(三代)’(조선일보·1931), 심훈의 ‘상록수’(동아일보·1935~1936), 홍명희(洪命熹)의 ‘임꺽정전(林巨正傳)’(조선일보·1928)등은 한국소설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김말봉의 ‘밀림’(동아일보·1935), ‘찔레꽃’(조선일보·1936)과 박계주의 ‘순애보(殉愛譜)’(매일신보·1940), 김내성의 ‘마인(魔人)’(조선일보·1939) 등도 인기를 모았다.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됐던 정비석의 ‘자유부인’은 장안의 화제였다. “입술을 고요히 스치고”, “감색 스커트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은미의 하얀 종아리”라는 표현에도 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는 서울신문 1954년 3월 14일자에 “(정비석)귀하는 남녀 관계 묘사만이 문학이고 성욕만이 예술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라는 요지의 글을 실었다. 대학 교수의 부인이 남편의 제자와 염문을 뿌리고, 남편은 직업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의 소설 ‘자유부인’ 덕분에 서울신문의 판매부수가 3만 부에서 9만 부로 올랐다고 한다. 청와대가 문화일보의 연재소설 ‘강안남자’의 ‘선정성’을 이유로 신문을 끊은 것을 보자니 2006년이 1954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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