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군에 근무하던 재미교포 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에게 국가기밀을 건네 간첩 혐의로 1996년 미 연방수사국(FBI)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자신이 전달한 정보가 언론이나 외국에 공개된 것을 정리해놓은 수준이라고 항변했지만 징역 9년 보호관찰 3년의 처벌을 받았다. 만일 로버트 김이 우리나라의 정보를 미국에 전달했다면 무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형법 98조는 ‘적국을 위해 간첩행위를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를 간첩죄로 처벌토록 규정,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동맹국인 미국에 우리 정보를 넘길 경우, 간첩죄로 처벌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국가로 인정되지 않는 북한은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해석되기도 했다. 우방국이 잠재적 적국이 될 수도 있지만, 외국을 위해 매국, 반역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법적으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셈이다.
열린우리당이 2004년 ‘적국’으로 한정된 간첩죄 적용 범위를 ‘외국’으로 확대하는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야당의 반대로 2년 넘게 국회에 계류중이다. 우리나라만 ‘간첩’에 관대한 셈이다. 그러나 영원한 우방만 믿는다는 건 냉혹한 국제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다. 미국을 비롯 독일, 프랑스 등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국에 해가 되거나 다른 나라를 이롭게 하는 행위에 대해 간첩죄를 적용한다. 동맹국인 한국의 로버트 김을 간첩죄로 적용한 경우다. 검찰이 “정보 유출 등에 대해 ‘적국’으로 넘어갔을 경우에만 간첩죄로 처벌하는 것은 우리나라뿐” 이라며 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한 건 그래서 타당하다. 최근 모 기업인이 민감한 국내 정보를 수집, 미국에 전달했다는 의혹과 관련, 검찰이 수사에 나설 전망이지만, 이 기업인의 혐의가 입증되더라도 현행법상 ‘간첩’은 아니다. 설혹 다른 나라 간첩들이 국가기밀을 빼내가더라도 북한으로만 넘어가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간첩죄로 처벌하지 않는다. 국내정보 유출 의혹을 전면 부인한 이 기업인에 대한 조사를 검찰이 위증 여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다.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 국가기밀 유출을 막기 위해서 법·제도 정비는 매우 시급하다. ‘북한간첩’만 간첩으로 규정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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