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극단 한울의 ‘작은 할머니’를 보고

연기자 빛나는 호연 불구 주제의식·긴장감 떨어져

“이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일제강점기부터 파란만장한 생을 살던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술 한잔에 한을 토해내며 희망을 불렀다. 그렇다면,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산으로, 들로 구슬땀에 손톱때 닦을 틈도 없이 남편 뒷바라지 자식 뒷바라지에 희망의 희자도 부를 틈이 없었다.

눈물을 숙명이라 여기고 아픔을 당연으로 이해했던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얘기가 연극으로 올려졌다. 광명 극단 한울이 지난달 23일 광명시민회관 대공연장에 올린 ‘작은 할머니’(엄인희 작·김태수 연출).

세월이 구비를 넘어 이젠 까마득한 옛 이야기처럼 변했지만 그 시절 그 아픔들이 지금도 아련하게 다가오는 건 무엇때문일까. 아직도 그 생채기가 아물고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페미니즘 연극 ‘그 여자의 소설’로도 잘 알려진 ‘작은 할머니’ 주인공은 일제의 핍박과 전쟁의 수난, 가부장의 굴레를 한 치도 비껴감 없이 온몸으로 받아 안은 그야말로 고난의 인물이다. 이름 석자 대신 조춘어미에서 김씨의 작은댁, 작은 할머니 등으로만 불린다. 본 남편은 독립운동한다고 훌쩍 떠나 무소식이고 딸의 배는 골린 채 시아버지 시중을 든다. 하지만 일본 순사들이 이리저리 찝적이는 통에 결국 쌀 한가마니로 김씨집안에 아들 씨받이로 들어간다. 이른바 작은댁이 된 것이다. 아들 하나만 낳으면 돌아갈 줄 알았던 어리숙한 주인공은 결국 둘째까지 임신한다. 독립운동 갔던 본 남편이 돌아오지만 씨받이로 배부른 처지에 해후를 맞지도 못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의지하던 큰댁-자신을 씨받이로 부른 김씨의 본처-마저 전쟁통에 잃고 전쟁이 끝나 김씨가 치매로 늙어 죽을 때까지 남편을 수발하며 산다. 이젠 늙어 작은 할머니. 자신은 없고 남을 위해서만 살아간, 그 고난이 그저 숙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 답답한 우리네 어머니다. 그 빛나는(!) 고난에 대한 대가는 김씨 집안으로 호적을 올려준 게 전부.

식민시대부터 현재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이 대하드라마는 작은댁으로 분한 오차진(극단 한울 대표)과 큰댁을 연기한 김선애의 호연으로 관객들의 공감대를 충분히 끌어냈다. 귀분네(유안 분)과 김씨(박정일 〃)의 맛깔난 조역 또한 극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 세대와 분별되며 새로운 세대의 모습으로 대비돼 나타나야 할 아들 진범과 숙명같은 여성기에 눈물로 용서하고 포옹으로 희망을 찾아야할 딸 조춘으로 각각 분한 이수경과 김선화의 연기는 느낌표로 마감돼야할 장면을 말줄임표로 마무리짓게 만드는 아쉬움을 남겼다.

자연적 질감의 무대는 1930년대 사실주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둔덕구조까지 만들어내며 시대성과 농토성을 확보하는등 기대감을 일으켰으나 작품이 제시하는 다양한 시공간성을 소화해 내기에는 오히려 제약이 되기도 했다.

현재와 과거를 계속해 교차되는 장면 전개를 ‘학도가’나, 특히 ‘희망가’ 등의 다양한 변주로 넘나든 것은 시대적 질감과 극적 템포를 유지하는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작은댁과 현재의 작은할머니를 같은 배우의 의상 전환으로 진행시키다 보니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속도의 극적 긴장감을 많이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 모든 평가를 떠나 이 작품의 생명은 모든 걸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산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이 되물림되지 않길 바라는 주제의식에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이 오히려 여성의 수동성을 숙명처럼 이해하라고 느껴지는 까닭은 뭘까?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작은 할머니를 그저 공감과 이해로만 끌어낸 것은 원작의 의도와 많이 벗어난 건 아닐까.

객석을 메운 많은 어머니들의 끄덕이는 고개짓에 편치 않은 건, 공연의 목표가 은폐된 것을 폭로하는 것도 아니요, 일반화된 사실의 비틀어보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재현된 사실이 현재의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 사실이 누구나 공감했던 역사적 수난이라면, 그 상황에 대처하는 인물의 입장은 현대의 관객들을 고려해 새롭게 해석되어져야 한다.

극단 한울의 많은 공에도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왜, 지금, 이 작품을 올리느냐는 것에 대한 공연으로의 대답이었다.

/안경모 연극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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