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광교산(光敎山)에 자리 잡고 있었던 창성사는 고려시대의 진각국사가 입적한 사찰이다. 현재 절터(寺址)만 남아 있지만 고려 초까지만 해도 89개 암자가 세워져 고승들을 배출했다고 전한다. 창성사가 광교산에 있었던 건 확실한데 언제 창건되고 폐사(廢寺)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도호부 불우조’에 “광교산에 창성사가 있었다. 이색이 지은 고려 승 천희(千熙)의 비명(碑銘) 있다”고 기록돼 있고, 1799년에 제작된 ‘범우고’에 “예전에 폐사된 것을 이제야 수리한다”는 내용이 전하는 것으로 미뤄 회복기에 들었다가 다시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수원시 매향동 전 충혼탑 경내에 보전돼 있는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는 높이 151㎝, 너비 21㎝로 1386년(우왕 12)에 세워졌다. 보물 제14호로 비문은 이색(李穡)이 짓고 각자는 승려 혜잠(惠岑)이 하였으나 글씨를 쓴 사람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안 된다.
비문엔 진각국사의 생애가 적혀 있다. 진각국사의 휘(諱)는 천희(千熙), 호(號)는 운산( 雲山)으로 고려 충렬왕 33년 흥해(興海)에서 출생했다. 13세에 화엄반룡사(華嚴盤龍寺) 주지 일비대사(一非大師)의 가르침을 받았고 김생·덕천·부인·개태(開泰) 등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였다.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치악산에 은거하던 중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 국사대화엄종사선교도총섭(國師大華嚴宗師禪敎都總攝)에 봉했다. 부석사(浮石寺) 등을 중수하는 등 전국 사찰 창·중건을 위해 진력했으며 76세에 창성사에서 입적하였다.
창성사 유적으로 건물의 기단석·주초석·옥개석·와편 등이 산재해 있는데 석축으로 된 우물터도 남아 있다. 이 우물터에선 지금도 약수가 샘솟는다.
그제 사단법인 광교산사랑시민운동본부가 개최한 ‘광교산 생태환경 보존 및 도립공원화에 따른 제3차 학술세미나’에서 “창성사를 복원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영주 부석사를 중건한 진각국사가 주지였던 수원 창성사는 부석사의 규모였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중론이다. 선견지명인지 몇해 전 수원시가 창성사지 1만여평을 매입했다고 한다. 창성사 복원 제의의 귀추가 주목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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