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한다. 법의 해석과 집행도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후략)’
전국지 C일보가 어제 단독 보도한 대전고법 제3민사부(재판장 박철 부장판사)의 판결문 내용이다. 대한주택공사로부터 임대아파트 해약 통보와 함께 퇴거 요청을 받은 일흔여섯살 노인은 6·25 참전 용사다. 정부지원비 7만원과 막노동으로 살다가 아내가 병사하고 나서는 혼자 산다. 그런데 딸이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니 딸 이름으로 계약된 임대아파트는 무효이므로 나가라는 것이다. 아내 병 수발 하느라고 시간이 없어 딸이 대신 계약을 했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호소했으나 1심에선 패소했다.
그런데 이번엔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전략) 계약은 딸 명의로 맺었지만 이는 병든 아내의 수발을 위해 자릴 뜨지못한 피고를 대신해 딸이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법 지식 부족으로 벌어진 실수로 판단된다. 피고는 이 주택 임차를 위해 본인의 돈으로 보증금을 내고 실제로 이 주택에 살았다. 따라서 피고는 사회적 통념상 실질적인 임차인으로 충분히 생각될 수 있으니, 법적으로도 임차인으로 보는 것이 공익적 목적과 계획에 맞는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승소 판결문의 일부 내용이다.
아무리 좋은 법도, 아무리 나쁜 법도 법을 집행하는 것은 인간이다. 재판도 인간이 한다. 재판은 사안의 실체적 접근에 대한 판결이다. 실체적 진실을 직권으로 가려낼 의무가 있는 형사재판은 물론이지만, 소송당사주의가 원칙인 민사재판도 사안의 실체적 접근이 뭣보다 중요하다.
사안의 겉만 보고 재판하거나 죄만 보고 죄명을 적용하는 기계적 판결은 법과대학만 나오면 누구든 할 수가 있다. 아니, 법과대학을 안나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판이 이런 게 아닌 것은 소송절차에 따른 판사의 고뇌에 대한 판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뇌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이래서 재판은 법으로 하는 것이지만 이에 앞서는 것이 있다. 양식이다. 재판은 즉 판사의 양심의 반영인 것이다. 대전고법의 그 항소심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명판결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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