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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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 사전에는 시대별로 통용됐던 ‘아부(flattery)’의 뜻이 10개나 적혀 있다. 고대 그리스인은 아부에 대해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도덕적 타락으로 정의했다. 중세에는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고 잠재적으로 사회를 동요시키는 요소로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사회가 보다 인간중심적이고 활동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아부에 담겨 있는 경멸적인 뉘앙스의 농도가 점점 엷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아부는 죄악이 아닌, 세상 어디서나 존재하는 애교 섞인 결점 정도로 인식됐다. 20세기 들어오면서 ‘아부’라는 단어에 대한 조롱의 강도가 약해졌다. 옥스포드 사전의 마지막 열번째 항목은 “실수를 그럴듯 하게 얼버무려주고 완화시켜 주는 것”, 나아가 “대범하고 관대한 행위”로까지 설명하고 있다.

아부가 먹혀드는 이유를 생리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아부는 세로토닌(포유동물의 혈액 속에 있는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으로 요약된다. 아부는 매우 기분 좋은 생화학 반응을 뇌에 일으키게 하는데, 침팬지나 인간이나 동일한 반응을 일으킨다.

힘이 약한 침팬지로부터 등을 긁어주는 아부를 받은 우두머리 침팬지의 세로토닌 수치가 증가하듯 아첨꾼이 허리를 굽히고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고 속삭일 때 대통령의 세로토닌은 요동친다. 진위 여부를 떠나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방귀를 뀌자 어떤 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알랑거렸다는 것은 아부의 명구(名句)다. 이 말은 한국현대사에 길이 남을 아부의 대명사가 되었다.

내가 하면 능력이고 처세술이지만, 네가 하면 비열하다고 지탄받는 게 아부다. 하지만 삶은 곧 아부이며 아부가 곧 삶이라는 심오한 경지에 도달한 고수들도 많다. 즉 아부는 “자기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 놓이도록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높이는 일종의 현실 조작이자 미래의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행하는 의도적인 거래”라는 것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 “우리 행정부가 미국의 시민만큼 훌륭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기도했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미국민의 지혜를 믿었을 때 저는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위대한 국민’이라는 칭송으로 대통령이 국민에게 아부한 것인데, 한국의 대통령들은 이런 아부를 할 줄 모른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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