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태운 유치원 차량이 빙판길에서 어렵게 됐다. 이면도로 길목에 주차한 차량 때문에 오고가지도 못하게 됐던 것이다.
길가던 행인이 이를 딱하게 보고 주차차량의 백미러를 뒤로 제쳐 접으려고 했다. 백미러만 제쳐도 간신이나마 지나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미러가 얼어붙어 말을 안 듣자 ‘탕탕’하고 두드렸다. 두드리다 보니 그만 부러져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유치원 차량은 그 틈새에 통과하여 멀리 갔다. 그런데 주차차량의 주인이 뛰어나와 행인에게 시비를 걸었다. ‘왜 백미러를 망가뜨렸느냐’는 것이다. 행인은 할 수 없이 백미러 값을 물어주었다.
안성에서 떡볶이 여주인이 어느 손님에게 봉변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고교생이 여주인을 비호하다가, 손님이 넘어져 넘어진 손님이 전치 5주의 진단서를 끊어 고소를 해 고소당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딱한 처지의 일을 보고 거드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회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피해가 발생하거나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 문제가 또 달라진다. 정의심의 발현이 가해자가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이다.
서울남부지법은 안양에 있는 한 오락실의 야구방망이 난투극 경찰관 2명에 대한 검찰의 특가법상 독직폭행혐의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오락실에 감금돼 있는 사람을 구하러 들어간 상황에서 경찰관의 방어권 주장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방어권과 방어권 피해의 형평성을 어떻게 보느냐가 앞으로의 초점이 될 것 같다.
경찰관이 권총을 지닌채 범인을 놓치면 총 들고도 놓쳤다고 비난하고, 경찰관이 권총을 쏴 중상입힌 범인을 잡으면 또 권총을 쐈다고 비난한다. 하물며 민간인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괜히 남의 싸움 말리다가 남의 싸움을 떠안기 십상이다. 가해자로 되몰려 구차한 입장이 되기가 일쑤다.
이러다보니 아예 못본 체 모른 체 하는 것이 상수인 게 사회적 인식으로 각인됐다. 노인이나 여성 같은 신체적 약자가 길가에서 완력이 센 남성에게 마구 얻어맞는 것을 빤히 보고도 구경만 하거나 그냥 지나간다.
이런 사회를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사회방어는 사회적 책임인데도 사회인은 이를 외면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 법이 문제이긴 보다는 법의 운용이 문제일 것 같다.
/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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