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恩來와 毛澤東

중국의 조정 중에는 황제 못지않은 2인자가 더러 있다. 한(漢)나라의 소하, 촉(蜀)나라의 제갈량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들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승상(정승)으로 황제를 잘 보필하여 나라를 평안케 했다. 조선왕조 같으면 황희 정승이 이런 분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래,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끝까지 보필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역시 인민들로부터 추앙받는 2인자다.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혁명 동지였으면서 만년 2인자로 그에게 충성을 다 했다.

1944년 5월21일 중국 공산당 6기 1차회의는 주석을 뽑는 자리였다. 투표는 유사오치(劉小奇) 1위, 저우언라이 2위 그리고 마오쩌둥은 4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내부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강력히 밀었던 사람이 저우언라이다. 1962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확대공작회의는 마오쩌둥에겐 실각의 위기였으나 저우언라이의 적극적인 비호로 위기를 모면했다.

저우언라이는 1976년 1월 타계할 때까지도 세상은 철저한 마오쩌둥 사람의 2인자로 알았다. 그런데 속내는 그게 아닌 사실이 죽은지 30년만에 그의 부인이 공개한 병상일기에서 밝혀졌다. 임종 전에 저우언라이의 구술을 부인이 받아 쓴 것으로 전해졌다. 1944년 투표에서 4위에 머문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추대한 것, 1962년 실각의 위기를 모면케 한 이듬해 벌어진 문화대혁명을 보고 퇴진시키지 않은 것을 두고 두고 후회했다는 것이다.

베이징 현지발 한 신문보도를 인용하면 이렇다. ‘한 차례의 정치 폭풍우가 다가오려고 한다. 아직도 투쟁이 필요한가. 공산당 철학은 투쟁철학이라는 것인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도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한가’라고 마오쩌둥의 계급투쟁 일변도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국가가 매우 불행하다. 건국 26년인데 6억 인구가 밥도 제대로 못먹고 있다. 공산당만 노래하고 지도자 찬양만 하는데 이것은 공산당 실패의 한 장면이다’라고도 했다. 경제 건설을 중시, 현대화 노선을 모색했던 저우언라이는 속으론 많은 갈등을 겪은 이색 2인자였던 것 같다.

여기서 생각되는 것은 북녘이다. 탈북 사태가 보편화한 북녘 실상이 ‘밥도 제대로 못먹고 지도자 찬양만 한다’는 두 번째 구절을 연상케 한다. 평양정권의 지도층 가운데도 저우언라이 같은 속내를 가진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저우언라이의 병상일기 공개 경위는 언젠가는 있을 마오쩌둥 격하의 예비 신호가 아닌가 생각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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