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의사’들의 생활과 활동상을 분석한 논문이 처음으로 나왔다. 김양수 청주대 인문학부 교수와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학술정보부장이 발표한 논문 ‘조선 후기 의관 집안의 활동’에 따르면 의외로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안산(安山) 이씨(李氏)는 7대 이윤영(李贇英)부터 15대 이명윤(李明倫)까지, 시대로는 1660년쯤부터 1900년대까지 8대 240여 년 동안 20여명의 의관(醫官)을 배출한 집안이다. ‘3대 이상이 의원인 집안의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속설을 생각해보면 상당한 의학 명문가이다.
이들의 의과 합격 평균 나이는 23.2세였고, 이들 중 3분의 1은 궁중의 의약을 맡은 관청인 내의원(內醫院)에 속한 내의(內醫)가 됐다. 지방관으로 임명되는 경우에도 유사시에 국왕이나 왕세자를 진료할 수 있도록 궁궐과 가까운 경기도 양천이나 적성 같은 곳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위는 매우 불안정했다. 의관은 대부분은 6개월마다 교체되는 임시직인 체아(遞兒)였다. 의관들은 수행원들을 자기 돈으로 고용하고 훈련해야 했으며, 말을 구입하는 비용도 지불해야 했다. 19세기 저명한 어의(御醫)였던 이현양도 당시 세도가인 풍양 조씨가 18일 동안 금강산 유람을 떠날 때 수행 요청을 받고는 ‘분부대로 따라가서 노는 데 짐이나 되겠습니다’라며 응할 수밖에 없었다.
안산 이씨 13대 이현양(李顯養·1783~1852)의 문집 ‘곡청사고(谷靑私藁)’와 ‘안산이씨세보(安山李氏世譜)’를 바탕으로 한 ‘조선 후기 의관 집안의 활동’은 의관들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선 결론을 유보하고 있다. 이현양이 200냥에 묘전(墓田)을 구입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의학사 연구로는 의관 집안이 대체로 부유했다고 여겨 온 반면 안산 이씨 가문의 후손으로 ‘곡청사고’와 ‘안산이씨세보’를 보전하고 있는 이덕규(李德圭)씨는 선대가 곤궁한 생활을 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의사’라는 직업은 대체로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보장되는 선망의 대상이다.예나 지금이나 최고 수준의 지식인들이기도 하다. 이런 의사들이 ‘의료법 개정안 반대’를 목적으로 집단 휴진하려는 사태를 조선시대 의관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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