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장군 이광(李廣)이 있었다. 사람됨이 입신출세의 욕망없이 그저 맡은 직분에 충실하여 우직했다. 이러다 보니 변방으로만 돌려졌으나 조정에 연줄을 대어 좋은 자리로 옮길 생각도 않고 불평할 줄도 몰랐다.
그러나 인덕과 용맹을 갖춰 휘하의 장졸들은 그를 진심으로 따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변방의 흉노족은 그 무렵 조정의 골칫거리였지만 이광을 두려워 했다. 이광은 언제나 싸움에 앞장서 몸소 장졸의 사기를 북돋웠을 뿐만이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사지(死地)에서도 승리로 기사회생(起死回生)하곤 하였다.
후일 역사가 사마천은 이광을 복숭아와 자두로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능변가는 아니었으나 성실함과 능력은 천하에 알려졌다. 복숭아와 자두는 그가 가만히 있어도 풍기는 향기에 따라 사람들이 절로 모여드니, 그 나무 밑에는 스스로 길이 생기는 법이다. 이광은 바로 그런 사람, 즉 도리불언(桃李不言)이나, 하자성혜(下自成蹊)’라고 평했다.(사기열전·이장군전·史記列傳·李將軍傳)
쥐가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이리저리 눈치를 살핀다는 뜻의 ‘수서양단’(首鼠兩端)은 같은 ‘사기열전’의 위기무안전(魏其武安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역시 한나라 무제(武帝) 때다. 그 당시 조정의 권력 다툼이 극심했다. 특히 두영과 전분의 세는 막상막하를 이루어 영일이 없었다.
어느날 두영의 친구이며 용장이었던 관부가 사고를 내어 어전회의에서 논쟁이 됐다. 사고는 별것이 아니었으나 권신들 간의 일이라 다툼이 치열했다. 보다 못한 황제가 중신들에게 어느쪽 말이 옳은가하고 시비를 물었다. 하문을 받은 내사(內史)직의 한 신하가 처음엔 두영쪽의 주장을 두둔하는가 싶더니 형세가 불리한듯 해지자 어물어물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전회의에서 물러나오면서 화가 난 두영이 내사직에 있는 그 사람에게 “수서양단이라니, 장부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하고 일갈했다.
사람이 사는 이치나 세상사는 예나 지금이나 그 원리엔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서 ‘도리불언’, ‘수서양단’의 고사가 생각난다. 정치판 특히 대선정국의 모양새에서 더욱 그렇다.
/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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