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어려울수록 문학은 꽃피게 마련인가 보다. 일제의 수탈이 가장 심했던 1930년대엔 김기림 김영랑 백석 서정주 윤동주 유치환 이육사 등 유난히 큰 시인이 많이 등장했다. 이들 중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났다. 백석(白石 또는 白奭)은 필명이고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18세 되던 1930년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신문사의 후원으로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한 백석은 1934년 귀국 이후 출판부 기자, 영어교사로 각각 2년씩 일하다 만주로 유랑을 떠났다.
‘자유(自由)’를 위해 생계를 버린 백석은 뛰어난 기억력과 영어 실력을 가졌지만 온갖 밑바닥 일을 전전하다 광복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분단과 함께 남쪽에선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모호했던 백석의 행적은 2, 3년 전에야 1995년 83세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대학 강사를 했다는 소문도 한때 있었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타계했다고 한다.
‘모던 보이’로 통하는 백석은 식민지 시민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편으로 모국어와 토속어에 집착했다. 소설로 문단에 알려졌지만 백석은 토속적이면서도 친근한 언어로 적지 않은 詩를 썼는데 최근 고형진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엮은 ‘정본 백석 시집’이 출간됐다. 백석의 시는 뛰어난 문학 텍스트 이전에 그 자체로 민족문화의 보고로 칭송된다. 먹을거리, 민속놀이, 사투리, 의상 등 민족문화와 관련된 주옥같은 내용이 작품마다 넘쳐나기 때문이다. 백석 작품에 대한 찬사는 “가장 한국적인 시”(유종호),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김현), “우리 문학의 북극성”(김윤식) 등 가히 최상급이다.
백석의 시들은 평안북도 토속어와 특이한 민속적 소재가 많은데 무엇보다도 먹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특히 음식에 관한 묘사는 세밀하면서도 감칠맛 난다. 백석에게 음식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양식이기 전에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정신의 양식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시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모르는” 지경인 터에 시대적 배경은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백석의 시에선 고향 사람들의 말소리, 음식 내음새가 풍겨 나와서 맛 있다. 이런 시는 계속 나와야 한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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