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TV 사극드라마 ‘대조영’에 등장하는 설인귀(薛仁貴)는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안동도호부 총독에 오른 인물이다. 평민 출신인 설인귀는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한테 패해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구한 공로로 대장군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요즘 중국 텔레비전에서 그 설인귀를 주인공으로 한 대형 사극 ‘설인귀 전기(傳奇)’를 방영하고 있는데, 여기서 고구려는 ‘발료(渤遼)’라는 정체불명의 나라로 등장한다. ‘발해’와 ‘요동’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 발료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역사에서 존재한 바 없다. 당시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 ~ 682)은 ‘발건왕(渤建王)으로, 연개소문은 ‘철세문(鐵世文)’으로 나오는데, 이 역시 실존하지 않은 이름들이다. 이세민을 비롯, 당나라의 주요인물들이 실명으로 출연하는 것과는 영 딴판이다.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허구적 장치들로 가득 차 있다. 설인귀와 이세민의 인연이 악몽에서 시작하는 게 대표적이다. 이세민은 어느 날 꿈 속에서 발료군의 추격을 받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이때 어디선가 흰옷을 입은 장수가 바람처럼 나타나 그를 구하는데, 이 장수가 훗날 설인귀로 확인된다는 식이다. 설인귀가 발건왕의 딸 ‘소양공주(昭陽公主)’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는 연애담까지 끼어든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인 설인귀와 철세문의 대결은 무협지를 방불케 한다.
이런 내용에 대해 중국인들은 한국의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등의 이른바 ‘고구려 드라마’에 맞서기 위해 만들었다는 소문과는 달리 “(중국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인 고구려를 일부러 비켜 나갔다”, “중국이 소심증에 걸렸다”, “중국이 한국의 눈치를 보느라 고구려 정복의 역사를 피해갔다”고 분통을 터뜨린단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중국은 이 드라마에서 발건왕이 당나라의 책봉을 받았다거나, 소양공주에게 공물을 들려 보냈다고 하여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동북공정의 역사 인식을 반영했다. 소양공주가 설인귀와 부부의 연을 맺고, 이세민을 패배시킨 천세민은 권력을 찬탈한 뒤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는 역적으로 그려진다. 바야흐로 한·중간 드라마의 전쟁이 시작됐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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