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당리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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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리(錦堂里)’는 화성시 마도면의 한 마을이다. 1949년 8월 14일까진 수원군 마도면 금당리였다. 금당리에선 조선 초기 무렵 사금(砂金)이 대량으로 채굴됐다. 연못을 만들어 금을 모았다 하여 금당곡(金塘谷)이라고 불렀었다. 조선 고종 재위 때인 1880년쯤 인근 남양(南陽) 고을 원이 금당곡을 지날 때, 마을 풍경이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다 하여 지금의 부락명 금당곡(錦堂谷)으로 바뀌었다. 8·15 광복 직전까지 사금을 채취하는 것을 봤다고 원주민들은 얘기한다.

금당리에 사람들이 거주한 건 조선 초기 1천400여년 쯤으로 추측된다. 조선이 건국돼 도읍지 한양(漢陽)이 조성되던 초기여서 많은 사람들이 상경하던 중 농업·어업을 하기 좋은 곳이어서 정착한 것으로 상고된다. 또는 혼란한 시대를 피하여 바다가 가깝고 산수가 수려한 이 곳을 은둔지로 선택한 것으로도 유추된다.

풍수지리상 금당리 동쪽은 망월제(望月薺)로 산 끝이 마무리돼 바다의 조수가 치 받아 안으로 휘어 도는 형국이다.

남쪽은 살포제(殺捕薺)가 감아 돌아 빗기섬이 가로 놓여 바다의 밀물은 보이지만 썰물이 보이지 않아 재물이 고이는 형세다. 서쪽은 둥굴봉이 노적형이어서 의식(衣食)이 넉넉하다.

서산(西山)은 꿩의 혈로 돼 있어 알을 부화하는 모형이어서 자손이 번성한다. 북쪽 돌파제(乭破薺)는 좌우로 포청수 역할을 한다. 명당수(名堂水)가 흐르고 해항(海港)선로가 양호해 가히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길지(吉地)다.

화성시 마도면 금당2리 주민들이 4년 전 이맘 때 펴낸 ‘錦堂二里 由來史(金塘谷 유래사)’는 40쪽의 소책자이지만 보면 볼수록 순박한 정성, 훈훈한 인심, 마을 풍경처럼 아름다운 애향심이 지면에 배어 있다. 더욱이 책 뒷부분엔 5편의 詩가 실려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긴다.

“천리 타향에 머물더라도 / 힘겨울 때 늘 힘이 되는 / 그리운 이름, / 세상이 변하여 잊고 살아도 / 고향을 향하는 마음 / 죽어서도 잊을 수 없다네”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란 제목이 붙은 이 詩는 금당리 주민 성충용(70세) 선생의 작품이다. 120여 가구가 오순도순 모여 사는 금당 1리, 2리 주민들의 마음이 모두 이와 같을 듯 싶어 소개하였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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