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역신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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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 ? ~ 666) 가문은 그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세도가였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인 자유(子游)와 아버지 태조(太祚)는 둘 다 막리지를 지냈다. 태조는 당시 귀족들의 최고 수장 격인 대대로를 역임했다. 고구려 귀족들은 연태조가 죽자 연개소문 가문을 누르려고 했다.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 받았다. 연개소문이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자 반대파 귀족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고 여기에 영류왕까지 가세했다.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으로 발령하고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를 눈치 채고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군사들을 사열한다는 명목으로 귀족들을 불러 모은 뒤 정변을 일으켰다.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 참석한 귀족 100여명을 살해하고 다시 왕궁으로 들어가 영류왕을 죽인 후 영류왕의 아우인 태양왕의 아들 보장왕(고구려 28대 마지막 왕)을 세웠다.

정변 직후 연개소문은 최고위직인 대대로엔 취임하지 못하고 막리지에 머물렀지만 그의 아래에서 대대로는 물론 국왕도 무력한 존재였다. 연개소문은 대대로를 무력화하고 막리지 중심의 정치 체제를 구축, 점차 정치·군사적 권한은 물론 국정 전반을 장악해 나갔다.

연개소문은 대당(對唐) 정책은 집권 초기부터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진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를 침략할 구실만 찾고 있던 당나라는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이유를 들어 연개소문을 비난했다. 연개소문은 당의 침략이 이미 결정되고, 그 침략의 명분이 자신에게 정면으로 맞춰져 있는 이상 당과 전쟁을 불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장왕 4년(645) 요동으로 쳐들어온 당태종의 17만 대군을 격파했지만 결국 고구려가 멸망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귀족 세력의 분열이었다. 귀족 연립체제를 부정하고 모든 정치권력을 자신의 일가에만 집중시킨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의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아들들 사이의 권력 다툼과 당과의 전쟁 과정에서 급속히 분열됐다.

오늘날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대당 항쟁의 충신으로 보는가 하면 고구려를 멸망케 한 역신으로 지목한다. 하지만 독재 정권 유지에 대한 집착과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우리 민족사상 고구려라는 대제국을 사라지게한 장본인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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