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東春)스님은 1932년 제주도 북제주군에서 출생했으나 일본에서 자랐다. 8·15 후 귀국, 고등학교는 기독교 학교를 다녔다. 교회도 열심히 나갔다. 6·25 전쟁 때 군에 입대, 전장을 누비면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다. 휴전 직후 천성산 일대의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다. 사찰을 지날 때마다 살생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다가 우연히 양산 통도사에서 법문을 듣게 됐다.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자신이 부처가 되는 종교라는 말을 듣고 나서 절에 다니게 됐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얻어 생사를 벗어나고 싶었다. 출가를 결심하고 혼자 토굴에서 지내며 마음을 정리했다. 첫 토굴살이였다. 1955년 부산 선암사에서 석암스님을 은사로 늦깎이로 출가했다. 선암사는 경허스님의 제자인 혜월스님이 선 채로 열반에 든 곳이다. 석암스님은 경허 - 혜월 - 석호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동춘스님에겐 뚜렷한 주식처가 없다. 부산 선암사와 문경 봉암사, 봉화 각화사의 주지 등 몇번의 대중소임을 맡은 것을 빼고는 평생의 대부분을 토굴에 은둔하며 수행에만 매달렸다. 말 그대로 구름처럼 떠돌고, 물처럼 흘러가는 운수납자의 삶이다. 스님은 토굴을 자주 옮겨 다닌다. 토굴이 알려지면 바로 짐을 꾸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버린다. 주지를 내놓고 나면 그곳에서 인연 맺었던 신도와의 반연(攀緣)까지 딱 끊어버리고 훌훌 떠난다. 전국 곳곳에 스님이 수행한 토굴만도 수십군데다.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것이 좋아서지요. 한곳에 오래 머물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업을 짓게 됩니다. 소유하지 않으면 자유롭습니다. 부처님도 깨달은 후 평생을 옮겨 다녔습니다. 수행자에게 누더기 옷과 발우 하나만 있으면 다 가진 것 입니다.” 조계종단 원로회의 의원인 노스님이 토굴에서 사는 이유다. “나는 깨쳤다고 내세워 말할 것이 없어요. 확철대오 하기 전에는 내놓을 것이 없지요. 지견(知見, 알음알이)이 났다고 해서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몇 안 되는 신도들이 찾아와 물어보면 그때 그때 생각을 말해줄 뿐이지요.” 법문을 하지 않는 원로스님의 법문이다. ‘법화경’에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닦고, 편안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기를 수미산처럼 하라”고 했다. 동춘스님이 바로 그렇다. 스님은 지금 기림사가 있는 경주 함월산 ‘토굴’에서 수행 중이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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