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기득권층

프랑스 부르봉 왕조는 왕권신수설을 신앙화했다. 루이 16세는 “짐은 곧 국가다”라고까지 극언했다. 정치사상가 보댕 역시 저서 ‘국가론’에서 강력한 국가를 위한 강력한 왕권을 주장, 왕권신수설을 주창했다. 그의 강력한 국가론은 중상주의 발달에 선구적 기여를 했으나, 왕권론은 중상주의 발달이 부메랑이 되어 시민사회의 저항에 부딪혔다.

1789년 7월 부르봉 왕조의 거듭된 실정과 절대주의적 봉건제도에 시민사회가 들고 일어난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지배계급의 부패, 사회계급의 심한 격차 등에 대한 불만이 혁명문학 등이 도화선이 되어 불똥이 번졌다. 혁명의 성공으로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을 공포했다. 헌법을 새로 정해 공화정제(共和政制)가 출범했다. 루이 16세는 1792년 결국 처형되고 영화를 누리던 귀족들은 해외로 도피했다. 도피 생활은 비참했다.

나폴레옹 제정의 왕정복고로 공화정이 무너졌다가 나폴레옹 몰락에 의한 루이 18세의 집권으로 도망간 귀족들이 20여년만에 귀국했다. 귀족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옛 영광을 추구했다. 이른바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이 풍미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 절대 군주의 봉건제도 회귀를 꿈꾸는 귀족들을 본 탈레랑은 “그들은 아무것도 깨닫지 않았고, 아무 것도 잊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프랑스는 당시 루이 18세의 집권에도 시민사회, 시민의식의 발달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던 시절이다. 이런 시대적 추세에 역행하는 귀족들을 향해 탈레랑은 혁명과 도피로 겪은 고초에 정신을 차리기는 커녕, 옛 꿈에 젖어빠진 것에 질책을 가했던 것이다. 그 무렵의 프랑스 귀족사회는 무위 무능한 기득권층이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귀족은 물론 없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기득권층은 있다. 기득권층도 구기득권층, 신기득권층 등 이중 구조다. 한국 지배계급 양상은 신·구 기득권층 구조의 대립이다. 그러나 분명한 공통점 한 가지가 있다. 둘 다 무위 무능하다는 점이다.

권력과 무관한 시민의식의 발현이 오는 12월 대선을 심판하여야 한다. 대선을 둘러싼 말 유희는 갈수록 더 성찬을 이룰 것이다. 그들은 역시 아무 것도 깨닫지 않았고, 아무 것도 잊지 않았다. 시민의식은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인 것이 자연법적 사상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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