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현충일

인민군의 소련제 탱크는 괴물이었다. 중무기라고는 고작 박격포 뿐이었던 국군이 박격포로 아무리 공격해도 탱크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벽두, 국군 7사단 9연대 2대대는 포천시 신북면 연제기골 야산을 넘어오는 인민군 105전차여단 예하 부대와 맞서 싸웠다.

그로부터 57년이 지났다. 참 긴 세월이다. 그 현장에서 군화, 수통, 야전삽 등이 발굴됐다. 전사자 유해 18구도 수습됐다. 그러나 야산에는 100개가 넘는 참호터가 발견됐다. 적어도 100명이 넘는 국군이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과 싸우다가 거의 전사한 것이다. 국방부 유해발굴단은 유해를 8사단으로 봉송, 8사단은 어제 국립묘지 안장에 앞서 합동위령제를 올렸다.(5일자 본지 보도)

이들 전몰 장병은 비록 인민군의 남침을 저지하지 못하고 장렬히 옥쇄했지만 큰 공을 세웠다. 전선 후방의 전렬 정비에 시간적 여유를 갖게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육탄공격으로 탱크에 맞섰던 것이다. 수습되지 못한 유해가 아직도 많을 것이다.

6·25 참전용사 가운 덴 무공을 세우고도 훈장을 수여받지 못한 분이 많다. 자신이 훈장을 받게 된 줄 모른 가운데 연락이 두절된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YTN에서는 한동안 ‘훈장을 찾아드립니다’라는 프로그램으로 훈장의 주인공을 찾는 방송을 하기도 했다.

어제 광명 육군 52사단에서 뜻깊은 훈장 수여식이 있었다. 전국의 요소 부대에서 6·25 무공 수훈용사 300여명에게 수여하는 훈장 수여식이 52사단에서도 거행된 것이다. 뒤늦게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고 짚차에 분승, 부대를 사열하는 70대~80대의 노병들 모습은 경외스럽게 보였다.(5일자 본지 보도)

노병들 가슴은 아마 벅차게 뛰었을 것이다. 전사한 전우들의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웠을 것이다.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여 잘 가거라’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여!’는 ‘전우가’ 가사의 한 대목이다. 전사자나 생존자나 이들 참전 용사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지킨 덕으로 우린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실로 반세기 넘어 뒤늦게나마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수훈 노병들에게 위로를 보내면서, 젊음을 순국의 산화로 꽃피운 전몰 장병들 명복을 빌어 삼가 합장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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