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세간에서 하는 말 중에 ‘법대로 하라’라는 표현이 있다. 그 정확한 뜻은 알 길이 없지만 상식이나 도덕 등에 의해 적당히 해결하지 말고 공권력(경찰·검찰·기타 수사기관 등)에 호소하거나 법원의 유권적 판단에 의하라는 뜻일 것이다. 언뜻 들으면 이러한 방법이 애당초 합리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다.
사회생활을 질서 있게 해나가려면 법이 필요하다. 옛 로마인들은 법학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인류역사상 법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규범이다. 그러므로 법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퍽 자랑스러운 일이며 준법은 존경을 받을만도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에서는 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혐오감을 갖고 있다. 사실 예로부터 법학을 가리켜 ‘빵을 위한 학문’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법학과 타산적 결혼을 한 사람’이라고 비웃기도 하며 하이네(H.Heine)는 법학을 ‘가장 압제적 학문’이라고 하면서 로마법대전을 ‘악마의 성경’이라고 저주했다. 영국 격언에는 ‘착한 법률가는 악한 이웃이다(Good lawyer is bad neighbour)’라고 했고, 독일 격언은 ‘법률가는 악한 그리스도 교도(Juristen bose Christen)’라고 비난했다. 베를린의 검사 키르히만(Kirchmann)은 “법학은 학문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왜 법과 법률가 등에 대해 이러한 혐오감이 있을까? 법만능의 현실은 법이 사회현실에서 유리되고 특권층에 유리하게 작용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법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기이르케(Gierke)는 “인간 존재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과의 결합에 있다”고 했다. ‘사회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는 말은 바로 법과 사회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링(Jhering)이 “법은 사회생활의 조건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같은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물론 인간의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에는 법 이외에도 도덕 및 관습 등 다른 사회규범들도 있다. 그러나 법과 이외의 규범과의 차이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특히 도덕과의 관계가 더욱 그렇다.
법은 경험적인데 대해 도덕은 선험적(Apriori)이라거나, 법은 인간의 외면적 행위를 규율하는데 반해, 도덕은 인간의 내면적 이상을 규율한다거나, 법은 타율성을 갖는데 반해, 도덕은 자율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공권력의 유무에 따라 양자를 구별하고 있다.
블랙스톤(Blackstone)의 “법이란 지배자가 명령하고 피지배자가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거나, 오스틴(Austin)의 “군주가 인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거나, 켈젠(Kelsen)의 “법은 가언적 판단(Hypothetisches Urteil)으로서 강제규범(Zwangsnorm)”이라거나 다 그러한 사정들을 말해 주고 있다. 오죽하면 예링(Jhering)은 “강제없는 법은 타지 않는 불이요, 비치지 않는 등불이다”라고 했던가?
무릇 ‘법대로 하라’라는 게 공권력에 호소하거나 법원의 유권적 판단에 의하라는 뜻이라면, 법 이외의 사회통제나 심리적 강제는 제외될 것이지만 사회학자들은 그러한 것도 법의 속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회학자 파운드(R. Pound)는 “법은 강제력의 적용에 의한 사회통제”라고 하며, 법사회학자 에를리히(E. Ehrlich)는 “법은 재판규범은 물론 그 이전에 행위규범이 있으며, 오히려 이것이 제1차적 규범이다”라고 했다. 베버(M. Weber)는 “국가의 강제는 물론 심리적 강제에 의한 규범도 법”이라고 했다.
여기서 법에는 공권력과 같은 강제성이 있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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