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칠현(竹林七賢)’은 전설같은 이야기 속의 인물이 아니다. 서기 3세기 중국에서 파란 많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들이다. 중원이 위·촉·오 삼국으로 나눠져 있던 난세를 온몸으로 헤쳐나간 지식인들이다. 칠현은 혜강(223~262) 완적(209~263) 산도(205~283) 상수(227~272) 왕융(234~305)과 생몰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유령, 완함 등 7명을 일컫는다. 이들은 한때 죽림, 지금의 중국 허난(河南)성 지오쭤(焦作)시 북부지역에 있는 대나무숲에서 친밀하게 교류하며 청담(淸談·노장철학에 바탕을 둔 철학적 담론)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종국엔 뿔뿔이 흩어져 각자 제 갈길을 갔다.
칠현 중 혜강은 죽림에서 처음 기거하며 다른 이들을 하나, 둘 불러 모은 죽림의 주인 격이었다. 선비의 지조와 의연함을 지닌 채 위나라 사마씨들에게 맞섰던 그는 결국 39세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혜강은 자신을 고위 관리의 자리에 천거한 산도에게 절교서를 보냄으로써 사마씨의 미움을 샀다. 잘 나갈 수 있을 때 지조를 굽히지 않아 화를 당했다. 완적은 넘치는 해학과 속 깊은 재주를 지니고 영웅의 기상으로 천군만마를 호령하고 싶었으나 결국 사마씨 정권의 ‘꽃병’ 노릇에 머물고 만 인물이다. 그는 혜강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당시의 권력자 사마소에게 일언반구의 항의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붓을 들어 군주도 신하도 존재하지 않는 ‘무군무신론’을 써내려가며 슬픔을 달랬다. 하지만 혜강이 처형당한 지 1년 후 술독에 빠져 살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죽림의 장자(長者)’로 불리던 산도는 원만함의 대명사였다. 일찍이 노장사상에 침잠하여 세상사를 다투려 하지 않았고, 누가 물으면 그저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깨끗한 관료로서 고위 관직에까지 오른 그는 죽림의 배움을 현실에 옮겨다 놓았다. 하지만 부귀를 뿌리칠 수 없었던 인물로 후세들에게 비난받았다. 술로 세상을 퍼마신 유령, 스스로 미치고자 했던 완함, 죽림의 파수꾼 상수, 현학(玄學·도가의 학문)을 출세와 바꿨던 왕융 등 7명은 난세에 지식인이 갈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요즘 지식인처럼 (왕융을 제외하고) 줄서기, 곧 출세에만 급급하지는 않았다. ‘빼어난 속물’들이었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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