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바다 그 곁에서 - 홍순영

어둠을 어깨에 걸치고

빛나는 나신을 드러낸 그가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온다

젖은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오래된 기도가

뚝뚝 떨어져 하얀 배꽃 잎처럼 물 위를 떠가는데

아침이 오면 모든 것들은 제멋대로 반짝이겠지만

희망은 차고, 쓰리다

빈 방들 만 가득한 가슴 속

초점 없는 독백 만이 들락거리고

나는 끝내 저 어둠의 나신 앞에

헐벗은 꽃나무의 가지를 꺾는다

꽃가지를 밤새 잘근잘근 씹어도

못된 습관처럼 교묘하게 일렁이는 불꽃들아

어둠 속에 더는 일어서지 마라

헝클어진 머리, 찢긴 가슴, 부러진 발목이

그의 품에 안겨 떠나려 한다

내 손을 잡아 끌지 마라

떨리는 눈동자 속에 날 묻으려 하지 마라

저 거침없는 절망의 날갯짓에 홀린 척,

손을 베이면서도 놓지 못한

따스하며 푸르렀던 기억을 다 놓으련다

던져진 적막의 냄새가 살갑다

 

< 시인 약력 > 인천 출생 / ‘한국문인’으로 등단 / 한국문인 추천작가회·동남문학회·문파문학회·바람꽃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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