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原寺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기자페이지

수원 시내에 있는 사찰 가운데 하나인 ‘수원포교당(水原布敎堂)’은 원래 용주사(龍珠寺)포교를 목적으로 한 ‘수원불교보급소’였다. 1920년 당시 선구적 개화스님 중 한분이었던 대련스님이 수원 화성(華城) 4대문(창룡·화서·팔달·장안문) 안에 불교 홍포와 대중포교를 위해 수원천이 흐르는 남수문(南水門) 인근 길지에 산문(山門)을 열었다. 화성과 광교산(光敎山)의 첫자를 딴 ‘화광사’로 불리운 적도 있었지만 공식 사찰명칭은 수원포교당이었다.

일본강점기엔 부처님의 가르침이 절실히 요구됐다. 선(禪)의 이치를 연구하고 선풍을 널리 떨쳐 궁극적으로 불교의 중흥을 목적으로 선학원(禪學院)이 개원되고, 한국불교 근대 3대 포교당인 마산포교당(1912년), 수원포교당(1920년), 강릉포교당(1932년)이 차례로 건립됐다. 당시 승려들의 도성출입이 어려워 대련스님은 사월 초파일을 기해 수원불교보급소로 창건했다. 적극적인 포교의 대안으로 도심에 사찰을 건립한 것은 당시로선 대단한 일이었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의 행정중심 사찰 조계사(曹溪寺)가 1910년 서울 수송동에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인 ‘각황사(覺皇寺)’로 창건돼 산중에 은거하던 조선의 불교가 세상에 첫발을 내딛은 역사를 이은 불사(佛事)와 같다. 당시 각황사가 서울 4대문 안에 자리한 유일한 사찰로서 도시포교, 대중포교의 구심점이었듯이 수원포교당도 수원 사람들의 가슴 속에 불심을 심어 주었다.

불기 2551년, 부처님 오신 날인 올해 사월 초파일 수원포교당이 ‘수원사(水原寺)’로 개명된 것은 뜻 깊은 일이지만 사실 너무 늦었다. 1900년대 수원포교당과 함께 문을 연 통도사 마산포교당의 사찰명은 정법사, 강릉포교당은 관음사로 개명된 지 오래됐다.

수원 역사와 함께 해 온 사찰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물은 생명의 근본이다. ‘수원(水原)’이란 어휘와 지명(地名)이 주는 상징성이 더욱 심오하다. 수원불교보급소, 수원포교당의 불사(佛史)를 이어 받은 명찰(名刹) ‘수원사’가 수원시민들과 불자들의 정신적 귀의처, 수행처로서 거듭났다. 부처님 재세시 사찰의 코살라국의 기타태자와 사위성의 급고독창자가 함께 부처님께 지어드린 ‘기원정사’ 설립의 설화가 떠오른다.

/ 임병호 논설위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