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낡아서 색이 바랜 조리대에 나무결 무늬의 코팅종이를 갈아 붙였다. 지난해에 붙였던 노르스름한 코팅종이를 떼어내는 데 힘이 모자라 스무 살짜리 아들의 도움을 받는다. 혼자 하는 것보다 낫기는 한데 어째 시원찮아 보이는 건 왜 일까. 돌을 먹어도 소화를 시킨다는 나이의 사내아이들이 요즈음은 가늘고 나약해서 통 미덥지가 않다. 강한 육체에 강한 정신이 깃들진대 우리의 미래가 연약해져 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내가 나고 자란 전라도 여천에서는 해마다 칠월칠석날 들돌 들기를 했다. 들돌이란 두레나 농사행사에 관련한 대동품앗이 돌이다. 18세가 된 젊은이가 일정규격의 들돌을 들어 올리면 성인 품앗이꾼인 진쇠가 되었다. 이때 가장 큰 돌을 들면 수총각(首總角)으로 인정받았고 세 사람의 힘을 쓴다하여 보통 사람의 두 배 품삯을 받았다. 마을 입구 정자나무 아래에는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들돌이 대·중·소 세 규격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내가 보고 들은 건 들돌과 그에 얽힌 단편적인 유·무형의 흔적뿐이었고 자세한 내용은 아버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사내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돌 드는 연습을 하며 힘을 길렀다. 들돌 들기는 서민들의 성인식에 해당하였으니 당연히 혼례식도 함께 치렀다. 힘을 인정받아 명실 공히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농경 사회의 절반은 여자들의 힘으로 유지되었다. 많은 일을 함께 했지만 전라도에서는 남자들이 절대로 도와주지 않는 일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물 긷는 일이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무거운 질그릇 물동이를 사용해서 물을 길었다. 어머니들보다는 조금 ‘좋은 시절’에 나서 어릴 때 우리는 가벼운 양은 물동이를 사용했다. 먹고 놀고 공부만 하는 요즘 아이들과는 달리 걸음마만 떼면 뭔가 해야만 했던 아이들이 물 길러 다니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샘에서 물을 길어 가슴 높이만 통과하면 머리 위에 올려놓는 건 쉬운 일이었다. 가슴 높이를 통과하기 위해 수도 없이 덜 채운 물동이를 이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팔 힘을 기르다보면 어느 날 불끈 물동이가 머리위로 올라간다. 나는 한참 크는 열여섯 살 때부터 성인 물동이를 채워 이고 다녔다. 물동이 안에서 출렁거리는 물이 넘치지 않도록 바가지를 띄운다. 수건으로 똬리를 틀어 물동이 아래 받치고 한 손을 내리는 여유까지 부리며 걷던 방천길에는 할미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이 시대의 젊은 남성들은 힘보다는 근육질의 몸매를 과시하기 위하여 땀 흘려 운동을 한다. 수려한 외모에 금상첨화로 단단한 몸을 가진 일명 ‘몸짱 스타’들을 젊은 여성은 물론 중년 여성들까지도 좋아한다. 어쩌면 그에 정비례할 것 같은 리비도의 매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웃통을 벗고 장작을 패는 영화 속의 남자들처럼 적나라하게 과시하는 힘이 아닌, 어딘가에 깊숙이 키워가다가 제때에 꺼내 쓸 수 있는 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로봇이 판을 치고 별나라가 가까워도 음식을 섭취하고 대사를 하는 인간들, 특히 젊은 남성들은 적당한 노동으로 힘을 쏟아내야 한다.
오랜만에, 올해 고등학생이 된 둘째 아들과 팔씨름을 해 보았다. 얼굴이 붉어지도록 힘을 쓰고도 저보다 작은 엄마를 이기지 못하는 아이를 어찌할까. 컴퓨터 자판위에서만 노는 아이들의 손은 힘을 기르지 않아도 빠르기는 번개 같다. 저 가늘고 여린 손으로 술을 따르고 담배를 피우고 때로는 열정적인 사랑도 할 것이다.
고루한 생각인지 몰라도, 사내란 무릇 사람 하나는 안거나 업고 뛸 수 있는 비상용 힘을 기르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의 체격이 요즘 남자들의 평균 체중을 좀 웃돌더라도 말이다. 바꿔 말하면 남자란 쌀 한 가마니는 어렵지 않게 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족 중 누군가가 불시에 쓰러졌을 때, 길가다가 긴급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았을 때, 물에 빠져 촌각을 다투는 생명과 맞닥뜨렸을 때, 적어도 힘이 약해서 한 생명을 놓치는 결과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 힘은 또 얼마나 멋지게 작용할 것인가. 데이트를 하다가 여자 친구를 업어줄 수도 있고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하면서 착한 젊은이가 될 수도 있겠다. 체격이 건장하고 힘이 좋은 사내는 어디에 내 놓아도 믿음직스럽다.
최 연 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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