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까지의 도로는 그 기준이 소달구지나 가마였다. 상민들은 소달구지, 양반은 가마가 가장 큰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일상의 도로 중에 간선도로는 소달구지나 가마꾼이 서로 비켜갈만 한 노폭이었고 그 밖의 도로는 보다 좁았다.
화성 병점은 당시의 간선도로로 떡전거리였다. 보행 위주의 먼 길손들이 시장끼를 면할 수 있는 간식으로 떡을 사먹던 떡전거리로 유명했다.
‘서울이 무섭다니까 과천서부터 긴다’는 속담은 수도인 한양 물정이 두려워서만이 생긴 게 아니다. 과천은 한강 이남에서 서울을 가려면 거쳐야하는 요충지였다. 그런데 무서웠던 게 남태령 고개의 호랑이다. 지금은 고개를 깎아 낮아졌지만 옛날에는 험준했고 산림이 무성하여 남태령 호랑이는 북악산 호랑이와 더불어 소문난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과천 주막은 나그네의 집결지였다. 고개를 넘을 사람이 웬만큼 모아지면 무리를 지어 남태령을 넘곤 했다.
자동차 길이 생긴 것은 일제 강점기 시대다. 그때 만든 길을 새로 만들었다 해서 ‘신작로’(新作路)라고 했다. 아스팔트가 아닌 자갈모래로 덧씌우곤 한 ‘신작로’는 일제가 그들의 수탈정책 편의를 위해 강제노역으로 만들었다.
좌측통행이란 것도 자동차길이 생기면서 자동차는 우측, 보행은 좌측으로 하는 통행질서로 1921년 조선총독부 훈령으로 시행됐다. 조선시대의 보행질서는 ‘군자는 대로행’이라며 양반은 길 복판을 팔자걸음으로 걷고 상민들은 양켠 길가로 다니는 게 관습이었다.
건설교통부가 도로교통법상의 좌측보행을 우측으로 바꾸는 문젤 검토한다고 한다. 자동차 운전대가 왼쪽에 있는 나라의 대부분이 우측보행을 하고 일반인의 90%가 오른손 잡이어서 위급한 순간 우측으로 움직이는 순발력이 더 강하다는 것 등이 우측보행을 검토하는 이유인 모양이다.
문제점은 그동안 좌측보행에 길들여진 관습을 도로교통법을 고친다고 당장 적응이 되느냐는 것이다. 보도가 아닌 역구나 백화점 같은 다중의 공간 보행에서도 좌측통행이 일상화 됐을만큼 익숙된 것은 사실이다. 건설교통부는 이에 관한 연구용역을 한국교통연구원에 의뢰했다. 용역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지만, 더욱 궁금한 것은 독자 분들의 생각이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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