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면후심흑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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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을 후(厚)라고 하고 속마음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을 흑(黑)이라고 한다. ‘후’는 ‘후안(厚顔)’, 즉 ‘얼굴이 두껍다’ 또는 ‘의뭉스럽다’는 의미이고, ‘흑’은 ‘심흑(心黑)’, 즉 ‘마음이 검다’는 뜻이다. ‘후흑론(厚黑論)’의 창시자인 중국의 기인 리쭝우(李宗吾·1879~1944)는 “큰일을 이루려는 사람은 그 얼굴이 성벽만큼 두꺼워야 하고, 그 마음은 숯만큼이나 검어야 한다”며 “역사 속의 영웅호걸들이 성공한 비결은 ‘면후심흑(面厚心黑)’”이라고 했다.

얼굴이 두껍기로는 ‘삼국지’의 유비를 빼놓을 수 없다. 전쟁에 지고 돌아올 때마다 목놓아 울며 동정을 얻어냈다. 유비의 필생의 적인 조조는 마음이 검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내가 세상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세상 사람들이 날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힘은 셌지만 후흑을 못한 항우는 졌고, 약했지만 후흑에 능한 유방은 이겼다. ‘후흑’이란 말이 언뜻 부정적 이미지를 주지만, 그 제시방향은 세상을 사는 겸손한 지혜란 게 적합하겠다. 리쭝우는 ‘후흑’의 요체를 ‘두려운 마음’으로 봤다. 남의 밑에 있을 때 고개를 숙이면 비난과 공격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 화를 참지 못해 윗사람과 대립하지 않으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일을 면할 수 있다.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람은 누구나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 한다. 주머니에 송곳을 넣어두면 자연히 튀어나오듯 두각을 나타내면 좋다. 그러나 무리하게 성공하려고 하면 번뇌와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춘추시대 진나라에서 대를 이어 높은 벼슬을 지낸 범무자는 윗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 재주를 드러낸 아들 범문자를 몽둥이로 다스려 경계했다.

‘후흑론’은 ‘모든 불행은 잘못 놀린 혀에서 비롯된다’고 마무리 한다. 헌제가 조조를 제거하려고 장인인 동승에게 밀지를 전했으나 말이 말을 낳으며 번지다가 끝내 누설돼 유비를 제외하고 관련자 전원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귀비까지 목숨을 잃었다. 한비자(韓非子)는 “일은 은밀해야 성공하고, 말은 누설되면 실패한다”고 경고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은밀하게 행동해야 하고 남의 충성맹세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급소를 적에게 내보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정치인들이 쓰는 권모술수가 ‘후흑론’에서 비롯됐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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