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었다. 1395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한 뒤 이듬해부터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고 4대문과 4소문을 축조했다. 4대문은 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숭례문(남대문)·숙정문(북대문)이다. 4소문은 4대문 사이에 설치됐다. 동북에 혜화문(동소문), 서남에 소의문(서소문), 동남에 광희문(수구문), 서북에 창의문(자하문)이 들어섰다. 4소문은 4대문보다 노출이 덜 돼 외적의 침입 때 비상문 역할을 했다. 4대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성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유교를 중시한 태조는 인(仁)·의(義)·예(禮)·지(智)의 4대 덕목을 4대문 이름에 하나씩 담았다.
조선 22대 정조대왕은 수원에 화성(華城)을 축성(1794년 2월 28일 ~ 1796년 9월10일)하면서 4대문을 축조했다. 창룡문(蒼龍門)은 화성의 동쪽 대문으로 일반적으로 동문(東門)이라고 불린다. 창룡은 곧 청룡(靑龍)이며 동쪽 하늘을 맡은 태세신(太歲神)으로 중국 한나라 낙양성의 동쪽 문 이름으로 사용했던 바 있다.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서쪽 대문이다. 화서문의 편액은 화성 성역의 총책임자로서 총리대신이었던 채제공이 썼다. 팔달문(八達門)은 화성의 남쪽 대문이다. 정조대왕과 역대 임금들은 능행시(陵行時) 화성행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팔달문을 통하여 현륭원(융릉)을 다녀왔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쪽 대문이다. 중국의 오랜 역사에서 ‘장안’은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쓰여졌으며 이를 정조대왕이 북문의 이름으로 정했다. 태평성대를 구가한 한(漢)·당(唐)의 수도였던 장안의 영화를 재현하려 한 것이라 하겠다.
1795년 윤2월14일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에서 방화수류정으로 가던 중 장안문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고 수원유수 조심태에게 장안문 밖에 개간할 만한 땅을 물어보았다. 그때 조심태가 가리킨 지역은 곧 개간돼 화성의 생산 기반 시설로 국영 농장이었던 대유둔(大有屯)이 됐다. 화성은 한양의 4소문처럼 비상문으로 남암문·동암문·북암문·서암문·서남암문 등 5암문(五暗門)을 만들었다. 정조대왕이 전 국력을 기울여 축성한 화성이 1997년 12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화성의 4대문을 정조대왕처럼 통과하는 것도 화성 관광의 맛이요 멋이다. /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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