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밤 첫눈이 내렸다. 펑펑 내린 함박눈이 아닌 흩날린 싸라기눈이지만 그래도 첫눈이다. 가로수마다 거의 다 낙엽졌다. 앙상한 가지에 어쩌다 떨어질듯이 매달린 한잎 이파리의 삭풍속 몸부림은 지고 싶어서일까, 지기 싫어서일까, 보도에 수북이 쌓인 채 이리저리 밀리는 노란 은행나무잎 더미를 밟기가 웬지 저어하다.
눈은 겨울철 꽃이다. 그런데 옛 눈이 아니다. 뭉친 눈으로 눈싸움을 하다가 냉큼 한입 베어도 티없이 맑던 그런 눈이 아니다. 눈속에 티 투성인 눈이지만 그래도 눈은 겨울철 꽃이다. 그런데도 예전같이는 반기지 않는 눈이다. 온 누리를 뒤덮은 하얀 눈 세상에 터뜨릴 감상 같은 건 이미 메말랐다. 조금만 뿌려져도 자동찻길부터 먼저 생각해야하는 걱정을 안겨주는 게 이즈음의 눈이다.
눈은 풍년을 가져온다. 그런데 눈이 내리는 것이 예전같지 않다. 인간의 극성으로 망가진 환경에 제 몸이 더럽혀진 탓일까, 아니면 지구의 온실 탓일까, 겨울철이 되어도 꽃눈 피우기를 점점 인색해 한다. 첫눈에 더욱 소회를 갖는 것은 눈이 귀해지는 탓이다.
눈은 세월을 재촉한다. 첫눈이 내리고 나면 이내 한 해의 끝자락인 12월을 맞이한다. ‘희망의 새해…’라고 했는데, 이 해에 과연 뭘 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덧없이 간 세월에 보람보단 회한이 더 많은 삶의 궤적은 거듭 새로움을 다짐케 한다.
눈의 계절이 짙어간다. 비록 눈이 자주는 내리진 않을지라도 겨울은 눈의 계절이다. 가진 게 없는 이들이 먹고 살기에 더 힘든 것이 겨울이긴 해도 어차피 넘겨야할 고비다. 겨울은 재생을 채비하는 삼라만상의 휴식이다. 그리고 평화다.
비발디의 유명한 ‘사계’(四季)는 겨울을 평화로 묘사했다. 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인 그의 그같은 비유는 신부였기 때문인 지 모르지만, 고전음악의 태두를 이룬 건 후세의 이유있는 평가다. 비발디의 곡엔 역시 달관의 경지가 있었던 것이다.
때가 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는 자연법칙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변함이 없는 세월속에 변화의 수를 놓는 것은 인간사다. 고귀한 자수 그림을 세월에 각인하기도 하고, 추악한 자수 그림을 세월에 각인하기도 한다. 올 겨울의 한 가운데 서는 12월19일 대선은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큰 자수 그림을 수놓는 날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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