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노랫말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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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던 기형도(1962~1989) 시인이 1989년이 쓴 詩 ‘빈집’이다.

사랑을 떠나 보낸 집은 집이 아니다. 빈집이고 빈몸이고 빈 마음이다. ‘문을 잠근다’는 것은, ‘내 사랑’으로 지칭되는 소중한 것들을 가둔다는 절규다. 사랑의 열망이 떠나버린 ‘나’는 ‘빈집’이고 그 빈집은 관(棺)을 연상시킨다. 혹 미발표 유작이 발굴될진 모르지만 기형도 시인은 이 시를 문예지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일주일 전 쯤 “나는 뇌졸중으로 죽을 지 몰라”라고 말했다는 그의 사인은 실제로 뇌졸중으로 추정됐다.

사망한 지 근 20년이 됐지만 유고시집 ‘잎 속의 검은 잎’ 등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기형도 시인이 1987년에 쓴 노랫말 ‘시월’이 가수 심수봉씨의 최근 음반 11집의 13번째 곡으로 수록됐다. ‘시월’은 동료 기자이자 대학가요제 출신의 작곡가 박광주 씨의 곡에 가사를 붙이며 완성됐으나 그동안 노래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박광주씨가 곡이 완성된 직후 친분이 있는 심수봉씨에게 노래를 불러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후 잊혀졌던 이 노래는 2년 전 한 가요 프로그램을 통해 오랜만에 심수봉씨를 만난 작곡자가 다시 제안하며 빛을 보게 됐다. 문학 애호가인 심수봉씨는 “가사가 너무 와닿는다”고 ‘시월’을 불렀다.

“저기 어두운 나무 어둔 길 스치는 바람 속에서 / 말없이 서있는 추억 있어 나 여기 떠날 수 없네 / 이제 다시는 갈 수 없고 다시 이제는 오지 못할 꿈이여 시간들이여 / 나는 왜 잊지 못하나 길은 또 끊어지는데 / 흐르리 밤이여 숲이여 멈추리” - ‘시월’.

기형도 시인은 ‘내 마음 낙엽’이란 노랫말도 썼는데 역시 박광주씨가 작곡했다. 트로트풍의 노래라고 한다. 기형도 시인은 ‘오래된 서적’에서 “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는 왜 영혼을 검게 보았는가. 기형도 시인이 노랫말을 붙인 ‘시월’이 널리 애창됐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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