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는 지금은 비록 북녘 땅이지만 경기도 개성의 송도삼절(松都三絶) 중 한 사람으로 서화담, 박연폭포와 함께한다.
한시와 시조에 능해 재색을 겸비했다. 자는 명월(明月), 별명은 진랑(眞娘)이다. 당대의 풍류객 임백호는 후일 황진이의 묘소를 찾아 ‘청초 우거진 곳에 자는다 누었는다 /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누었는다 / 잔잡아 권할 이 없으니 이를 슬어 하노라’라는 시조를 남겼다.
황진이는 송악산 동굴에서 십년 째 면벽참선을 하고 있는 지족선사를 소나기 맞은 옷매무새 그대로 찾아가 파계시킴으로써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속담을 낳게 하기도 했다.
황진이가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은 거유 서화담이다. 둘이 풍월과 담론을 나누는 등 교제도 있었다. 그러나 황진이는 서화담을 굴복시키진 못했다. 한 번은 지족선사와 같은 방법으로 유혹했으나, 서화담은 얼굴의 물기를 닦아주며 끝내 오누이처럼 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시조는 서화담을 그리워한 내용이다.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둘러내어 / 춘풍 이불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룬님 오시는 날 밤 구비구비 펴리라’ 둘러내어, 춘풍이불, 서리서리, 어룬님, 구비구비 등은 절묘한 시어(詩語)다. 여기서 ‘어룬님’은 ‘얼다’의 어미(語尾) 변화로 달라붙는단 뜻의 정사(情事)를 말한다.
조선시대의 여류문학으로는 이밖에도 사대부집안 부녀층에 유행한 규방문학으로 ‘규방가사’가 또 있다. 계녀가(誡女歌), 춘유가(春遊歌) 등이다. 갓 시집온 새색시의 행신, 예절 등을 가사체로 시작한 것이 설화 등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
허난설, 황진이, 강정일당, 혜경궁 홍씨, 홍랑 등 이외에도 많은 경기도 여류들이 우리의 고전문학을 장식했다. 한국문화원연합회경기도지회가 이들의 작품을 모아 374쪽에 이르는 ‘경기도 여성문인-고전편’을 펴낸 것은 집대성한 점에서 매우 뜻깊다.
뿌리가 없으면 생명력이 없다. 경기도 기전사회 여류문인의 문학세계 뿌리는 고전에서 시작된다. “문제적 여성들의 삶을 밝혀냄으로써 현대적 문화콘텐츠로 활용될 수 있다”는 박혜숙 건국대 교수(집필진)의 말은 이유가 있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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