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12·12 쿠데타 주역인 신군부 세력이 권력 장악을 위해 활용한 과도적 기구였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사회 혼란을 빌미로 선포한 전국비상계엄하에서 설치됐다. 대통령 자문 기구 성격이었지만, 사실상 행정·입법을 장악한 초헌법적 기구였다.
국보위는 비대위·입법회의 두 시기로 나뉜다. 비대위의 경우 최규하 대통령을 의장으로 행정 각료 10명, 군 장성 14명 등 24명으로 구성됐지만, 실질적 권한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위원장인 상임위원회가 행사했다. 상임위는 산하에 사회정화 등 13개 분과를 뒀다. 비대위는 10월 국가보위 입법회의로 개편됐다. 정계·경제계·학계·종교계·법조계·여성계·노동계·언론계·향군 인사 등 각계 인사 81명으로 구성됐다. 전원 전두환 위원장이 임명했다.
국보위는 신군부 집권의 기반을 닦는 역할을 담당했다. 크게 정치규제를 통한 ‘반대정치 세력의 제거’, 공직자 숙정을 통한 ‘관료사회 장악’, 삼청교육대 등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한 ‘사회분위기 쇄신’의 세 가지였다. 언론 통·폐합과 출판 및 인쇄물 제한 등 언론 탄압도 이뤄졌다. 1981년 4월 11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해산될 때까지 156일 동안 입법회의는 법률안과 동의안 등 215건의 안건을 모두 ‘가결’ 처리했다. 신군부의 어용기관, 국보위의 ‘거수기’ 노릇을 했다.
국보위 시절 한승수 국무총리 지명자는 비대위 재무분과 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한 지명자는 재무분과 외환 담당 위원으로 4개월가량 세계은행과 중동 등에서 국외 차관을 들여오는 일을 담당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입법위원이었다. 당시 37세의 소장 정치학자였던 이 위원장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숙명여대와 이화여대에서 한 명씩 정치학 박사를 데려간 것이고, 처음엔 거절했었다”고 말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그는 입법회의에서 외교·국방위를 맡아 활동했다. 후일 입법회의 활동을 인정받아 민정당 비례대표로 11대 국회에 입성했다.
신군부 권력 도구로 민주주의를 유린한 국보위에서 활약했는데도 한승수·이경숙 두 사람은 이명박 정권의 실세가 됐다. 상상컨대 두 사람은 나애심의 노래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부르고 싶을 것 같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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