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궁기는 조상 대대로 이어온 가난의 절정이다. 쌀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도 시퍼런 봄철에 먹을 것이라고는 나물죽 아니면 밀기울 개떡, 이도 아니면 칡을 캐거나 소나무 새순가지를 벗겨 먹곤 했다. 이 무렵 미국에서 수년동안 무상지원 한 것이 480잉여농산물로 밀가루다. 춘궁기는 1960년대 중반 박정희시대에 비로소 단군 이래의 먹거리 가난을 추방했다. 음식물쓰레기가 남아돌아 골치아픈 지금 사람들 생각으로는 전설같은 얘기지만 70대 이상의 체험 세대는 생생히 기억한다.
역시 춘궁기가 있었던 시절엔 교통 통신 수단 또한 열악했다. 버스는 도시 중심으로 드물게 운행하여, 어쩌다가 빈 트럭이 가면 길 걷던 행인이 손을 들어 타곤하여 조수에게 몇 푼씩 건넸다. 도로라고는 신작로가 고작이었다. 고속도로가 사지사방으로 뚫리고 승용차가 보편화된 지금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
그 무렵 매매가 불가한 청색전화로 전화 보급이 본격화 된 게 1970년대다. 집에 전화가 있어도 별로 쓰지않고, 공중전화는 아예 필요없게 된 지금 사람들은 믿기지 않은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토록 살기가 어렵고 교통 통신이 불편해도 사람 사는 인정은 잘먹고 편리한 세상에 사는 지금보다 더 했다. 겨울철이면 일가 대소가를 몇 십리씩 걸어 서로 찾아 왕래한 것은 농한기에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인정을 사람 사는 법도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전화나 핸드폰 한 통화, 컴퓨터 한 번 두들겨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친인척에게 일년 열두달 내내 서로 소식 끊고 살기가 예사다. 교통수단도 편리하고 승용차 한 번 굴리면 찾을 수 있는 친인척을 서로 안 찾아 얼굴 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바쁘다고 한다. 바쁜건 맞다. 그렇지만 더 큰 원인은 마음이 가난한데다, 그나마 마음씨가 닫혀 있기 때문이다. 그저 내 한 몸, 가족만 생각하여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이즈음의 우리들 생활은 모두가 이 모양이다.
설이 다가온다. 설에 친인척이며 고향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뿌리를 만나는 것이다. 귀성전쟁을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니다. 명절 귀성은 마지막 남은 우리의 뿌리찾기 미덕인 것이다. 설날 모처럼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덕담으로 좋은 만남,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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