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 준 율법으로 자기 소득의 10분의 1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레27:30~34). 십일조의 유래는 아브라함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창14:20). 이 의무는 계속 강조돼 훗날 선지자 말라기는 십일조를 떼어먹는 이스라엘 백성을 신랄하게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다(말3:6~12). 문제는 ‘십일조가 오늘날 교회에도 유효한가’란 점이다. 이 물음은 지난 1월31일 방영된 MBC ‘100분 토론’에서 종교인 과세 주장을 편 한 패널이 “십일조 제도는 구약에만 있고 신약에는 없으며, 영국 등 유럽에서는 이미 십일조가 사라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제기됐다. 물론 목회자들은 “예수님은 그 율법을 폐하려 함이 아니라 ‘완전케’하려 오셨다”는 성경 말씀을 강조하며(마5:17), 십일조는 여전히 구약의 연속선상에서 유효하다고 입을 모은다. 십일조나 십계명과 같은 계명들은 “주님이 그렇게 했듯이 율법의 본래적 의미를 따라 행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약 성서에서 예수가 십일조를 강조하는 부분은 마태복음 23장 23절, 누가복음 11장 42절에 나온다. 예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십일조를 한다고 자랑하자 책망하면서 “십일조를 준수하되, 공의와 하느님의 사랑을 담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였다. 목회자들은 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교회는 세상과 구분돼야 한다”고 강조한다(마22:15~22).
‘부자로 죽는 것은 치욕이다’라고 말한 카네기, 십일조를 삶의 일부로 여겼던 록펠러 등 세계 부호들의 지속적인 기부 활동은 어릴 때부터 십일조에 익숙한 기독교 전통에서 나왔다. 목회자들은 ‘온전한 십일조’란 소득의 10분의 1이라는 수치적 해석에 국한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십일조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재산이 다 하느님의 것이라는 청지기 정신에 철저했다는 설명이다(고후8:1~15). 김성영 성결대 교수는 열 중에 하나를 드린다는 것은 나머지 아홉도 하느님의 것이라는 의미라고 말한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10분의 10, 생명까지 내놓을 수 있는 신앙 고백적 차원의 해석이 더욱 복음적일 것”이란다. 십일조를 온전히 바칠 돈이 없어서 교회가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세상이어서 논란이 생기는 것 같다./임병호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