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겨울의 일기 - 김순자

“그 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라고 시작되는 내 일기

아버지는 초겨울마다 새 것을 만드셨다 왕겨 섞인 황토를 덮고 꼭꼭 다지던 마당. 빈 벽 가득 자로 잰 듯 일정한 길이의 장작이 포스터처럼 걸리고 아버지는 새 짚을 엮어 이엉을 얹으셨다 허리가 잘린 문살을 창호지로 연결시킨 쪽문을 열면 날마다 두께를 달리하는 햇살이 뭉턱뭉턱 쏟아져 까무러치곤 했다 그 자리, 하얗게 바래지던 그런 날. 빈혈에 갇힌, 독한 편두통에 한쪽으로만 머리가 기울던 그런 날들.

한 바가지의 메주콩을 맛있게 씹었다 그런류의 포만감은 다소 나의 허기를 치유하던 아스피린이었다 부러진 지겟다리 이랑처럼 갈라진 검은 손바닥 아! 그리고 머루알 같이 매달린 검은 눈망울들. 거기 묶인 당신의 이름, 아비라는 덫이 싫었겠다 그 분은 그 무겁고 캄캄한 이름이

얕은 쌀독과 무관하게 머리맡에 쌓이던 아버지의 책 붓과 벼루, 창백한 화선지! 분노였으리라 아마 제 구실 못하는 것들에 대한 계산된 폭음 당당한 파괴 몹시 두려웠다 너무 많이 울었나보다 무모한 자해마저 사랑해 버렸던 그 날 싸락눈이 내렸고 무작정 내달리던 논둑마다 찍히던 붉은 발 도장. 어느 해부터인가 아버지는 더 이상 새 짚을 엮어 이엉을 얹지 않으셨다. 겨우내 나는 감기를 앓았고 발바닥의 유리를 빼고도 가슴 깊이 조각된 얼음덩이 하나 지우지 못 한

아직도 나는 투병 중이다.

<시인 약력> 경기 가평 출생 / ‘문예운동’으로 등단 / 한국문인협회 파주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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