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에서 교황의 권력은 국왕의 권력보다 강했다. 11세기 후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히리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 맞서다가 눈 속에서 3일 동안 빌어 겨우 용서를 받은 사건(‘카노사의 굴욕’)은 교황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고 주로 쥐나 벼룩이 옮기는 전염병 페스트(흑사병)가 퍼지면서 신자들의 신앙심이 떨어지면서 교회의 힘이 약해졌다. 그후 왕과 봉건 제후들은 교황의 권위에 대항했고, 13세기에 교황은 프랑스 국왕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끌려가게 되는 수모를 당했다(‘아비뇽 유수’). 힘이 약해진 많은 교회들이 권력과 타협, 세속화됐다.
당시 독일은 정치적 분열로 교황의 착취가 심했다. 이때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고쳐 짓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벌을 면하는 증서인 이른바 ‘면죄부(免罪符)’를 판매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발표, 교황의 권위에 맞섰다. 루터에게 구원이란, 면죄부가 아닌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한 것이었고, 권위는 교회가 아닌 오직 성서에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교황 레오 10세와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에게 주장을 거두어들일 것을 요구했으나 많은 제후와 농민들이 루터를 지지했다.
루터파는 황제와의 오랜 싸움을 전개했고 그 결과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회의를 통해 독일에서 루터 파 교회가 공인됐다. 스위스 제네바에선 칼뱅이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그는 인간의 구제는 신에 의하여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주장했다. 그는 신자가 자기의 직업에 근면하게 종사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중산 시민 계층에게 받아들여져 초기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됐다. 칼뱅교도를 영국에선 청교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네덜란드에선 고이센이라고 불렀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으로 중세 기독교 세계의 통일은 무너지고 신교(루터 파, 칼뱅 파)와 구교(가톨릭)의 대립이 심해졌다. 대립은 종교 전쟁으로 폭발했는데, 가장 큰 종교 전쟁은 30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1648년 가톨릭, 루터 파, 칼뱅 파에게 모두 신앙의 자유를 진정하는 내용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됐다. 며칠 전 “하나님을 믿어야 면죄부를 받는다”고 호소하는 한 열성신도를 지하철 안에서 보았다. 종교 개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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