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들의 배신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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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項羽)는 요즘 시각으로 봐도 스타 기질과 흥행 요소를 두루 갖춘 영웅이다. 정상인과 달리 눈동자가 두개였던 항우는 태어날 때부터 비범했다. 5척 단구가 평균이었던 시절에 키가 8척(1m80)이 넘었다. 초나라 명문 귀족의 자제로 절세미인 우희(虞姬)와 염문을 뿌렸다. 진시황의 아방궁에 불을 질렀다는 방화 혐의는 최근의 고고학 연구 덕분에 벗었다.

항우는 24세(BC)에 진시황이 세운 진(秦)나라에 반기를 들었고 3년 만에 18명의 제후를 거느린 서초패왕(西楚覇王)에 등극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역발산 기개세(力發山 氣蓋世: 힘은 산을 뽑을만 하고 기운은 세상을 뒤덮을 만하다)’란 명구를 남기고 31세에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들으며 자결했다. 극적 요소가 풍부한 항우의 일생은 장이모우 감독의 ‘패왕별희(覇王別姬)’에 앞서 당·송·명대 시인묵객들의 단골소재로 등장했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도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자고이래로 첫 번째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항우는 진을 멸망시키고도 천하의 대권을 손아귀에 틀어쥐지 못했다. 투박하지만 정이 가는 항우보다 매력이 떨어지는, 평민 출신으로 권모에 능한 유방(劉邦)에게 권력을 내주고 말았다. 다잡은 황위를 놓친 항우의 패인은 몇가지로 회자(膾炙)된다. 1차적 책임은 항우 본인의 정치력, 전술, 성격에 문제가 있겠지만 그러나 항우가 대표한 권력집단, 요즘으로 보면 선거 캠프의 분란이다.

항우의 유일한 책사였던 범증(范增)의 책임이 크다. 항우가 작은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항우 캠프에서 입지가 높았지만 그의 계략은 여러 수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결국 항우에게 두고두고 정치적 부메랑을 초래했다. 항우 진영을 떠나 유방을 선택한 한신(韓信)의 인물 됨됨이 탓도 크다. 정의보다 개인 감정에 따라 처신한 한신은 유방 진영에서 공을 세웠지만 결국 모반죄에 걸려 죽임을 당했다. 항우가 가장 신임했던 측근 주은(周殷)이 마지막 순간에 배신한 것도 항우를 사면초가에 빠뜨린 결정타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의 성공과 실패는 측근이든 우수한 인재든 탁월한 정치력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리더십에 달려 있음을 시사한다. ‘4·9 총선’을 치른 정치판 사람들 중엔 별별 사람이 다 있다. 특히 범증, 한신, 주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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